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Skip to menu

Liferoad

지역 연구


Liferoad

예수님 때의 초대 교회와 성전 | 요셉 슐람

by Liferoad posted Sep 08, 2016
?

Shortcut

PrevPrev Article

NextNext Article

Larger Font Smaller Font Up Down Go comment Attachment

예수님 때의 초대 교회와 성전

 

 

is1609001.jpg

Some rights reserved by israeltourism

 

 

임모세 옮김 | 요셉 슐람

 

신약 성경과 고대 유대문학의 관점에서
 

오순절 사건 이후 여러 사도들의 행적들 중의 첫 이야기가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저자(누가) 자신이 관찰하였던 바대로 편집하거나 우연적인 배열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초대교회 때에 누군가가 예루살렘의 성전이란 장소를 찾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그 저자의 의식 속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여기에서 그 본문과 상황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몇몇의 주석과 함께 사도행전 시기의 성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이야기들과 구절들을 나열할 것이다. 그리고 본문을 살펴본 이후 필자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 적용되는 몇가지의 관찰과 해석을 설명할 것이다.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오순절 사건이 있고 난 후 바로 사도행전의 저자는 우리에게 좀 특별한 언급을, 즉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continued to meet together in the Temple courts)"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필자에게 생기는 질문은 바로 이 "힘쓰다(continued, 계속하였다)"이다. 메시아 예수의 제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였던 장소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었다. 그렇다면 이 "힘쓰다(continued, 계속하였다)"라는 말은 단지 오순절날 이후만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오순절날 그 이전에도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갔었던 예수의 제자들의 일상까지도 말해야 하는지. 예수의 제자들이 성전을 그들의 정기적인 "모임"의 장소로 사용하였다는 정황이 있는지. 만일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의 제자들은 성전으로 가서 예배드리는 유대인들이나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예수처럼 동일하였다. 예수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좋아하였으며, 그곳을 "나의 아버지의 집..."이라 불렀다.

 

 

사도행전 3:1-2,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2장 46절과 같이 이 구절에서도, 우리는 예수의 두 제자가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된다. 즉 1세기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침 기도와 오후 기도. 우리는 오후 기도를 "민카(Mincha)"라고 부른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갔었던 것이 이 "민카(오후 기도)"였다. 기독교에서 듣는 가장 불편한 논쟁 중의 하나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바울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영혼을 "찾기" 위해 올라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바울(회당에서)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단지 영혼 구원을 위해 이 장소로 갔다고 추정하는 것보다 복음과 전도에 더 반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우리는 바울이 많은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한 이후 그의 사역의 마지막 때까지도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가며, 제사를 드리며, 사람들에게 선물을 전하는 이 연속성 안에서 볼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미문에서 절름발이의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메시아(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이 이름없는 절름발이 사람을 치료한다. (각주 2)

 

 

사도행전 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이 구절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서 다시 "백성에게 말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미문에서 절름발이를 고쳐준 이후의 여파였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성전 뜰 안에서 일어난 일을 비밀로 남길 수가 없었으며, 그러자 곧바로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기 위해 성전을 지키는 사람들이 도착하여 예수의 부활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사도행전의 본문을 살펴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난 이후 다음날에도 성전의 뜰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흥미있는 일이다. 성전의 뜰은 모이는 장소이자 예배를 드리던 장소였다. 사도행전 5장의 다음 구절들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 5:20-21, 24-25, "20-21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24-25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3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민카" 기도를 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다. 절름발이 사람이 치유되었던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일어났다. 이 장(5장)에서는 주님의 사자가 그들에게 성전의 뜰에 서서 새로운 생명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모두 다 전하라고 하였던 것을 우리는 안다. 이것은 그들이 잡혀서 더 이상 예수와 그의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가르치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이후였다. 이 성전의 뜰은 그들이 보통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모였던 장소였다(각주 3). 이 베드로와 사도들의 끈기는 단순히 목표에 대한 용기와 헌신의 행동만은 아니었다. 사도들은 그들 자신의 민족에 대해서 선교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 구원의 메세지가 당시의 이스라엘에게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느꼈다. 그들의 진정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며, 그리고 그들의 연설은 어떠한 실익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유대인들처럼 기도하기 위한 첫번째 장소로, 그리고 예수가 메시아라는 복음을 가르치기 위한 두번째 장소로 성전으로 올라갔다(각주 4). 

 

 

사도행전 21:26-29,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된 바울의 에피소드는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였다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이러한 사건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을 균형있게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 15장에서 하나님께 회심을 한 이방인의 할례 문제로 이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서 바울과 교회 공동체 리더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공회가 열렸었다는 기록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토론의 결과로 이방인들은 유대교나 할례를 강요하지 않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 또는 "성도들의 공동체"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사도들은 단지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주었던 율법만을 따를 것을 요구할 뿐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홍수 이후 모든 인류는 노아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 율법은 명백하게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편지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로부터 받아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에게 전하였으며, 공동체들에게는 이방인들이 할례없이도 성도들의 모임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렸다. 바울은 이 편지와 함께 소아시아와 그리스에 있는 이방인 모임에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모았다. 그는 오순절(Shavuot, שבועות) 절기 때에 그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왜냐하면 이 절기는 첫 열매의 명절이자 토라를 받은 절기이기 때문이다. 이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공동체의 장로들은 바울이 그 도시로 들어올 때에 그와 만나게 되며, 다음의 내용들을 그 앞에서 말하게 된다. 

 


사도행전 21장 19~24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바울은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전하였다. 이에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그에게 먼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공동체에는 "율법에 열성인 자가 수천"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에 대해서 필자는 장로들이 기회를 마련하여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소문에 맞서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였다고 본다. 이 소문에 해명하기 위해서 야고보는 이렇게 제안한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깍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예루살렘 공동체 장로들의 이 제안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성도들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행동과 태도를 알 수 있다. 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몇가지가 있다.

 

교회 공동체 장로들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자녀들을 할례하지 말고, 또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말 것을 가르친다는 바울에 대한 소문으로 인한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에 대해 두려워하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예수 안에서 바울의 믿음에 대해 "신의"와 "정통성"에 대한 검증으로서 그가 성전으로 가는 것과 결례에 참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즉, 바울이 성전으로 가는 것과 결례를 위한 그의 기도는 유대인에게 모세의 율법에 배반하라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소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완전히 일소하게 될 증거가 되리라 보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초대교회는 성전 의식을 하나님과 메시아 안에서 믿음의 확실성 입증에 대한 권위적인 역할로 보았다. 그래서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전을 자주 찾았으며,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행하던 유대인의 규범적인 관행에 참여하는 것도 계속해서 이어갔다.

 

물론 바울은 야고보와 예루살렘 장로들의 요청에 순종하였다. 그는 네 사람과 함께 성전으로 함께 갔으며, 결레를 위해 비용을 지불하였으며, 또한 이 경우에는 겐그레아에서 있었던 서원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각주 5). 야고보의 요청에 대한 바울의 순종은 몇몇 기독교 주석가들이 간주하는 것처럼 그의 믿음의 약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전에 대한 그리고 율법에 대한 믿음에 대해, 그리고 유대인의 규범에 대한 헌신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건 이후 여러번 그 주장을 반복한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각주 6)

 

성전은 유대인의 예배와 공동체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우리는 복음서 첫부분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의 나이가 늦은 열두살 때에 "바르 미츠바(Bar-Mitzvah)"을 지키기 위해서 그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왔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방문할 때마다 성전에 갔었다는 것을 듣는다. 또한 우리는 예수가 성전을 "나의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는다.

 

1세기의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말하자면 성전과 제사장들이 악하고 타락하였다고 여겼던 에세네파와 같은 분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약성경, 특히 사도행전에서 보는 관점과는 다르다. 예수의 제자들은 성전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고, 구제 헌금을 전하였다. 적어도 바울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특별한 여행을 하였던 이유 중의 하나는 매년 최소 한번은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야 하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각주 7).  이것은 사도행전 24:14-18에 기록된 바울의 항변에서도 매우 명확하게 나타난다.

 


사도행전 24:14-18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각주 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사도행전 22:17-19,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뜰 밖에 모여있는 군중 앞에서 연설하였던 바울의 항변을 기록한 것이다. 바울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성난 군중들로부터 그를 구하기 위해 로마 장교가 달려 내려간 이후, 바울은 안토니 성벽에까지 이어져 있는 길에 서있었다(각주 9). 그들은 바울이 유대인만을 위한 지역에 이방인들을 데리고 왔다고 믿고 있었다. 그 변명에서 바울은 그의 다메섹 길 경험 이후 그의 예루살렘 귀환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성전에서 그가 기도하며 비몽사몽 가운데에 있을 때에 즉시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나님이 그에게 말하였던 것을 군중들에게 말하였다. 바울에게는 성전이 여전히 하나님께 가서 기도하는 곳이다. 사실 바울이 성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비몽사몽(비전)은 다메섹 길에서 예수와의 경험에 대한 신뢰와 용인에 대해 증명과 같은 것이 된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과거 옛선지자들이 하였던 것처럼 여전히 누군가는 하나님을 만나고 의사소통하는 장소였다. 이것이 우리가 결론을 맺을 때에 기억해야할 중요한 부분이 된다.

 

 

사도행전 25:8,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해변지역인 가이사랴에서 유대총독 베스도에게 연설하였던 바울의 그 변명에는 예루살렘 산헤드린에서 했던 같은 말들이 반복되었다. 사도행전 24:14,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사도행전 28:17,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에 반하는 어떠한 나쁜 일도 하지 않았다는 그의 상황을 명백하게 본다. 즉, 성전에 대한 바울의 자세와 행동은 모세의 율법을 따르며 성전을 "주님의 집"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모세의 율법(Law of Moses)"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유대인의 율법(the Law of the Jews)"이라는 말로서 로마인이었던 베스도가 이해할 수 있도록 훨씬 자연스럽게 사용하였으나, 그 때에는 모세 율법과는 관련이 없으면서 유대인의 전통과 관련이 있는 관습과 율법을 포함하여 사용하였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사도행전 28:17에서 우리는 구전되어 내려오는 유대인의 율법을 언급하며 바울이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당시 베도스에게 대표자였던 유대 지도자들이 실제적으로 모세의 법을 바울이 범하였다거나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을 그가 배척하였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여간 이 본문은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을 구속하기에 충분한 어떤 새로운 증거나 사실들을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실제로 성전을 배척하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다.

 


요약과 결론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것을 다루는 사도행전의 주요 구절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에 그 근거로부터 유추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몇가지 관찰들이 있다.

 

1. 예루살렘에 있는 초대교회는 하나님께 경배와 예배를 드리는 중요한 장소로서 성전을 찾는 일을 지속하였다. 사도들은 모든 유대인이 행하였던, 즉 제물과 예물을 드리는 정규적인 규범으로서 기도와 예배를 위해 "매일" 정기적으로 성전을 자주 방문하였다.

 

2. 바울을 포함하여 사도들은 성전에서 행해지는 일반적인 예배에서 배제되지 않았으며, 단지 "이방인"이 눈에 띄었을 때,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으로 데려왔다고 허위로 고소되었다.

 

3. 바울과 그리고 필자가 추측하건대 초대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 조차도 토라 율법만이 아닌 성전에 관련된 유대교의 규범적인 모든 전통과 관습도 지켰다.

 

4. 초대 교회는 예수의 희생에 대한 효력과 성전에서의 공존과 예배 사이에서 어떠한 갈등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의 희생은 성전의 희생 제사의 완성과 성취이지, 성전의 무효 선언으로 고려되어서는 안된다.(각주 10)

 

5. 어느 시점까지 초대교회는 성전을 정기적인 모임의 장소로 만들었어야 했다. 이는 사도행전 2: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에서 알 수 있다. 모임 장소로서 선택이 되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있었다면, 그것이 이유라고 표명이 되었어야 한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성전 뜰에서 모여야 하는 뚜렷한 목적은 없었을 것이며,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적절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이 본문의 결론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거기에서 예배와 공부를 위해 모였을 때, 개인 보호에 대한 많은 것들이 있어야 했을 것이며, 그리고 그들의 모든 예배와 가르침은 예루살렘의 최하층 서민들에게도 받아들여져야 했을 것이다. 사실 성전의 뜰이 초대 교회의 모임 장소로 선택된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의 예배와 행동에 대해 지나가는 행인들이 곧 명확하고 공공연한 목격자였다고 필자는 추측해 본다. 이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상황과 오늘날의 메시아닉 유대인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1) 현재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으며, 또한 모리아 산에 유대인을 위한 성전이 가까운 시일 내에 세워질 것이라는 가망성은 매우 보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죄 때문에 하나님이 성전을 자신들에게서 거둬 갔다는 것에 동의한다. 또한 현재 성전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외치며, 거기에서 기도하면서, 그리고 성전이 세워질 것을 바라며 시위하는 몇몇 작은 소그룹들이 있다. 이스라엘 상황은 지속적으로 그러한 어떠한 도발도 금지하고 있다. 이 소규모 극단주의 그룹의 행동은 더 나아가 성전산 입구에서 시위하거나, 성전의 물품들과 예배에 필요한 악기들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 유대인들이 성전을 세워 적그리스도가 곧 등장하여, 그리고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빨리 오시기를 바라는, 즉 다소 절제되지 않는 종말론을 따르는 기독교 단체가 있다는 것에 필자는 부끄럽다. 이 "성전을 준비하는" 단체들이 메시아 예수를 모독하며, 메시아닉 유대인을 격렬하게 저지하고 있음에도, 일부 기독교 단체들은 그들에게 상당하게 많은 재정을 지원하고 있다.

 

  2) 이스라엘에서 메시아닉 유대인과 스스로 메시아닉 유대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유대교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성전에 대해서는 더 특별하다. 이스라엘에서 기독교 쪽이나 메시아닉 쪽에서도 이에 대한 자료들이 많지 않다. "성도들"의 대부분인 한편에서는 예수에 대해 명확하게 기록된 히브리서, 즉 히브리서 7: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라는 구절을 빠르게 붙잡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 모든 땅의 회복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강하게 바라고 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메아리로 남고 있다. 그리고, 스가랴 선지서의 말씀에 대해 문자적 해석을 더 강조하는 기독교인이 곁에 있을 때, 성전의 회복에 대해 열망하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3) 성전에 대한 사도들의 입장에 관하여 사도행전을 살펴봄으로서 알게 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유대인의 문화 유산과 생활 방식에 대한 지속적인 연결과 관찰이다.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 중의 누군가가 토라에 대한 그들의 신실성이 조금이라도 벗어났다고 언급되고 있는 부분은 신약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들 모두는 유대인의 생활 방식에, 그리고 예수 안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선지자의 율법이 성취되었고 회복되었다는 그들의 믿음 안에서 신실하게 머물러 있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도들의 믿음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와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사도들은 확신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성전으로 가는 것과 거기서 예배드리는 것을 이스라엘의 진실된 믿음과 세상을 위한 예수의 메세지, 이 두 관계의 단절로 보지 않았다.

 

  4) 필자는 성전 재건립에 관해서 예루살렘에서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예측하며 모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개인적인 관점은 기원후 11세기에 살았던 마이모니데스의 입장과 매우 가깝다. 필자는 조상들의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그리고 메시아 예수를 찬양하기 위해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필자는 예루살렘이든 아프리카의 조조나무(역주: 자두 나무 일종) 아래에서든 신령과 진실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여기든 저기든 모든 같을 뿐이다. 하지만 만일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다면, 그리고 그 성전이 모세의 율법에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다"면, 그리고 진실한 제사장들이 있다면, 나는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서 성전이 파괴되기전 1세기 때에 바울과 베드로, 요한이 하였던 것들을 하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온맘을 다해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으로서 필자가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매우 주제넘는 일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볼때 과거의 사라진 시스템을 다시 복구하는 것이나, 또는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 시대에 향수에 젖어 탄고기 냄새 맡기를 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초대 교회, 신약 교회 또는 진리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실성을 회복하기 위해 헌신된 우리는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실을 재빨리 붙잡아야 한다. 회복에 대한 우리의 전체적인 생각을 웃음거리로 만드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담을 쌓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허락할 수 없다. 우리는 신약성경 전체, 특히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처럼 모든 것 안에서 초대교회처럼 되기를 바라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도들은 세계에 흩어져 있을 때에는 매안식일마다 하나님과 메시아를 예배하기 위해 유대인의 회당으로 갔으며,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는 성전으로 가서 모였다. 그들은 유대인 절기와 관습들을 지켰으며, 그리고 이방인 형제와 자매들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동등한 자로 환영하였다. 우리가 신약 성경 교회의 회복을 말할 때,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각주:
1. 누가복음 2: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2. 사도행전 3:8, 10,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3. 사도행전 5: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4. 사도행전 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5. 사도행전 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6. 사도행전 24:14
7. 출애굽기 23:17,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8. 여기에서 이 헬라어는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Sacrifice"의 의미로 사용된 동일한 표준어이다. 위에 언급된 경향에 대해 또 하나의 예로는 번역가들이 영어로 사용하려는 단어 선택의 시기이다.
9. 사도행전 26: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10. 야딘 교수(Prof.I.Yadin)는 히브리서가 예수를 메시아로 영접하였으나 절망하며, 믿음을 거의 포기에 이르렀던 에세네파 그룹을 위해 씌어졌다고 주장을 한다. 만약 야딘 교수의 주장이 옳다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히브리서에 대한 입장은 "사해 종파의 관점"임을 말해준다. 이러한 에세네파의 관점은 교회의 성도가 된 바리세파들의 입장과는 다를 수가 있다.

 

 

 

<저작권자ⓒ라이프로드>

 

 

Who's Liferoad

profile

Liferoad

Contents Manager, Liferoad

Jerusalem, Israel | email: liferoad@vialiferoad.org

Atachment
Attachment '1'

  1. Liferoad

    원 뉴 맨(εἷς καινὸς ἄνθρωπος)과 메시아닉 유대인

    원 뉴 맨(εἷς καινὸς ἄνθρωπος)과 메시아닉 유대인 Some rights reserved by ashley.adcox 임모세 선교사 원뉴맨, 이 말은 소위 보수신학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신사...
    Date2018.04.09 CategoryLiferoad
    Read More
  2. Liferoad

    메시아닉 유대인과 그들의 현대 역사

    메시아닉 유대인과 그들의 현대 역사 Some rights reserved by Claudius Prößer 임모세 옮김 | Ludwig Schneider (이스라엘 투데이) 1948년 이스라엘이 국가가 되었을 때, 예수를 믿는 유대인 성도들이 약 150명 정도였다. 우크라이나 출신, 아브람...
    Date2017.09.14 CategoryLiferoad
    Read More
  3. Israel Mission Forum

    유대인 뿌리 운동의 평가

    유대인 뿌리 운동의 평가 An Evaluation of the Jewish Roots Movement -본 내용은 2017 이스라엘-한국 신학 컨터런스 및 2017 이팔선 강의 내용입니다.- Some rights reserved by mprivoro,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묘 데이빗 미쉬킨(David Mishkin) 교수 |...
    Date2017.04.17 CategoryIsrael Mission Forum
    Read More
  4. Liferoad

    이스라엘 메시아닉 리더들: 교회는 이스라엘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메시아닉 리더들: 교회는 이스라엘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개혁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복되고 있다" Some rights reserved by augusto gomes 임모세 옮김 | 이스라엘투데이 이스라엘의 베테랑 메시아닉 리더인 야곱 담카니와 요셉 슐람은 담카니...
    Date2016.11.12 CategoryLiferoad
    Read More
  5. Liferoad

    유대주의 관점에서 보는 "성삼위일체"

    유대교 관점에서 보는 "성삼위일체" Some rights reserved by betta design 임모세 옮김 | 요셉 슐람 서론 기독교 학술계에서 가장 철저하게 논의된 주제 중에서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성삼위일체"이다. 4세기 초, 니케아시(현대 터어키, 이즈닉)에서 ...
    Date2016.09.18 CategoryLiferoad
    Read More
  6. Liferoad

    예수님 때의 초대 교회와 성전 | 요셉 슐람

    예수님 때의 초대 교회와 성전 Some rights reserved by israeltourism 임모세 옮김 | 요셉 슐람 신약 성경과 고대 유대문학의 관점에서 오순절 사건 이후 여러 사도들의 행적들 중의 첫 이야기가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
    Date2016.09.08 CategoryLiferoad
    Read More
  7. Liferoad

    [이슈]"기독교 시온주의"는 불편한 단어인가?

    "기독교 시온주의"는 불편한 단어인가? - 본 글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라이프로드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Photo: Some rights reserved by ohad* 임모세 옮김 | Israel Today 기독교라는 기치 아래 유대인에게 다가가는 것은, 시온주의와 연관이 있...
    Date2016.01.30 CategoryLiferoad
    Read More
  8. Liferoad

    [이슈]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제 3 성전을 기다려야 하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제 3 성전을 기다려야 하나? 정말로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영화로운 세번째 성전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건물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 성전이 되시는 예수의 재림과 그 완성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때문에 빗나간 견해로...
    Date2015.10.12 CategoryLiferoad
    Read More
  9. Silk Road Forum

    키르기즈의 기독교사

    키르기즈의 기독교사 - 유목, 융합, 포스트모더니즘의 신앙- "현재 키르기스에 들어와 있는 선교사들은 주로 한국, 미국, 호주, 캐나다. 유럽,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필리핀 등지에서 들어와 여러 영역에서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한국인 사역자는 주로 ...
    Date2015.08.20 CategorySilk Road Forum
    Read More
  10. Silk Road Forum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이슬람 이해(2)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이슬람 이해(2) "투르크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들을 살펴본 이유는 위구르에서 터키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투르크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부닥치는 장벽들을 이해하고 극복하여 좀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투르크 무...
    Date2015.08.10 CategorySilk Road Forum
    Read More
  11. Silk Road Forum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이슬람 이해 (1)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이슬람 이해(1) "중앙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에게 현지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 김성운 교수, 본 글은 2015년 실크로드 포럼의 주특강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Photo: Some rights re...
    Date2015.08.03 CategorySilk Road Forum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