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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이슬람 이해(2)

by Liferoad posted Aug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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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이슬람 이해(2)

 

 

 

"투르크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들을 살펴본 이유는

위구르에서 터키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투르크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부닥치는 장벽들을 이해하고 극복하여 좀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투르크 무슬림들 가운데 재생산하는 교회를 세우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김성운 교수, 본 글은 2015년 실크로드 포럼의 주특강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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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 rights reserved by Steve Evans

 

 

 

 

3. 투르크 이슬람 해석의 표현 형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투르크인들이 이슬람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정통 이슬람과 비정통 이슬람이라는 이슬람 해석의 두 흐름은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 충돌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터키에서 나타나는 이슬람의 다양한 형태들은 순니 이슬람과 비정통 이슬람이 동일한 지역에서 동일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공존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되어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정통 수니 이슬람에서 비정통 이슬람 신비주의나 성인숭배의 영향이 나타나고, 신비주의 수피즘에서 정통 이슬람의 영향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동시에 다른 이슬람 사회들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터키에서도 순니 이슬람과 비정통 이슬람이 터키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 반응하며 터키 이슬람의 특징적인 형태들을 만들어내었다. 다시 말해서 터키 이슬람의 형태란 평범한 서민층에서부터 시작하여 수피 집단과 울레마(ulema) 그리고 국가기구와 정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계층이 자신들의 구조적 특성에 따라 형성해낸 이슬람의 특성과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터키 이슬람의 그러한 표현 형태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다: 민속 이슬람(folk Islam), 경전 이슬람 (medres Islam), 신비주의 수피 이슬람(sufi Islam) 그리고 국가 이슬람(political Islam). 이러한 네 가지 표현 형태는 터키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투르크 무슬림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투르크 이슬람의 특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전이슬람과 수피즘이 혼합된 형태인 타리카트 이슬람을 다섯 번째 형태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1) 경전 이슬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통 순니파 이슬람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쿠란과 순나를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인 표준으로 삼는다. 이러한 이슬람에 대한 해석과 실천은 이슬람 율법학교인 메드레스(medres)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울레마(ulema)라고 불리는 율법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경전 이슬람은 메드레스 이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슬람 율법학교(medres)의 시초는 10 세기 이집트 카이로에 설립된 엘-에즈헤르 메드레스 (eI-Ezher medres)라고 알려져 있는데 현재 엘-에즈헤르(el -Ezher) 대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실제로 메드레스를 중심으로하는 경전 이슬람 전통이 이슬람 세계에 보편적으로 확장된 것은 투르크인들이 건국한 대셀축제국의 영향 때문이었다. 10 세기 이후 쿠란의 문자적인 내용 보다는 내면의 감추어진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그러한 의미를 파악한 사람들은 문자적인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분파들이(Batini) 이슬람 세계에 빠르게 확산되면서 교리적, 정치적으로 정통 이슬람에 강하게 도전하는 일이 발생했다. 순니 이슬람은 그러한 비정통적인 공세에 대응하고 이슬람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바그다드를 비롯한 주요 이슬람 도시들에 율법학교(medres)들을 세우고 이슬람의 두 경전인 쿠란과 순나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와 교육을 실시했다. 이들 이슬람 율법 학교들은 이미 이전부터 모스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이슬람 율법, 이슬람 신학, 해석 그리고 하디스와 같은 분야 뿐만 아니라 의학, 수학, 천문학과 같은 분야들도 포함하는 종합적인 학문연구와 교육을 실시하였다.


투르크인들은 이슬람 수용초기 때부터 이슬람 율법 학교의 영향을 받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투르크 유목민들이 아무다리아강 지역에 정착할 당시 이미 순니 이슬람은 이 지역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신학, 철학, 법학 분야에서 중요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러한 영향으로 카라한 왕조 시대에 부하라, 사마르칸트와 같은 도시들은 순니 이슬람을 대표하는 신학과 철학들을 가르치는 율법학교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하라에서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하디스 학자들 가운데 한명인 이스마일 엘-부하리(IsmaiI el-Buhari: ~869)가 배출되었고, 순니 이슬람의 가장 영향력 있는 분파 가운데 하나인 마투리(Maturi) 학파의 창시자인 에부 만수르 마투 리디(Ebu Mansur el-Maturidi : ~944) 역시 이 지역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뒤이은 여러 이슬람 학자들에 의해서 쿠란과 순나의 학문적 연구와 해석을 중시하는 이슬람 율법학교(medres)가 이슬람에서 하나의 권위 있는 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한 종교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아무다리아강에 정착한 투르크인들은 자연스럽게 율법학교를 중심으로 쿠란과 순나의 해석과 가르침에 기초한 경전 이슬람을 수용하고 발전시켰다. 아무다리아강 지역의 율법학교는 이후 아나톨리아로 이주한 투르크인들에게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터키인들이 수용한 경전 이슬람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피파였다. 하나피파는 쿠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유추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하디스도 중요하지만 쿠란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므로 하디스도 쿠란의 빛 안에서 이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의미하는 것은 쿠란은 열려있는 책이며 모든 시대에 무슬림들은 자신의 시대에 맞게 쿠란을 해석할 수 있고, 해석해 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피를 추종하는 터키와 중앙아시아 지역의 무슬림들이 다른 지역의 무슬림들에 비해 더 쉽게 현대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쿠란과 이슬람에 대한 그와 같은 해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투르크인들의 이슬람 수용에 있어서 수피 신비주의 이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터키에서 순니 이슬람이 공식적인 이슬람으로 득세하게 된 이유는 13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3 세기 국가의 기틀을 세운 투르크계 왕조들은 율법학교와 울레마 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순니 이슬람과 울레마들은 수피 이슬람의 종교적 구심점인 테케(tekke)와 수피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오늘날 터키의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몇 가지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것과 같은 순니파의 가르침을 따른 외형적인 의식을 행함으로서 종교적 의무를 충분히 수행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내면의 세계에 신과의 합일과 같은 신비주의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터키 사람들이 단순하고 율법중심적인 경전 이슬람에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순니 이슬람의 수세기에 걸 친 공세와, 저항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수피 이슬람을 뿌리 뽑기 위한 터키 정부의 강력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테케들의 활동이 수면 아래에서 계속되어왔고, 최근에 다시 수면 밖으로 나와 그 영향력을 확대시켜 가는 것은 그러한 현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대셀축제국이 순니 이슬람을 공식적인 이슬람해석으로 받아들이면서 나타난 결과는 율법학교들이 국가의 보호와 지원을 받는 동시에 국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가의 율법학교에 대한 지원과 통제 정책은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모든 투르크계 국가들에서 일반적으로 실시되어왔고 그러한 정책은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율법학교에 대한 국가의 보호와 통제는 터키 이슬람에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첫째는 국가가 이슬람을 통제하고 조정하는데 율법학교가 하나의 기구의 역할을 하게 된 것과, 둘째는 율법학교가 국가의 지원과 보호 아래서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면서 순니 이슬람을 공식적인 이슬람으로 받아들이도록 한 것이다. 역사적 자료들은 그러한 활동의 결과가 아나톨리아 셀축제국 시대부터 도시들과 정착민들 사이에 분명 하게 나타나기 시작하고, 15 세기 오스만제국의 시대에 이르면 율법학교를 중심으로 순니 이슬람이 국가의 공식적인 이슬람으로 완전하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을 보여 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국가와 율법학교 사이에 지속되어온 이러한 관계는 터키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국가주의 이슬람과 종교부의 역할을 이해하는데 중 요한 역사적 배경이 된다.

 


2) 민속 이슬람


어떤 종교든지 일반 대중들은 그 종교가 가지는 원래의 신학적 원리와 내용에 자신의 문화적, 사회적 특성을 가미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한 문화적, 사회적 특성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종교와 혼합되고 결국 동일시된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종교가 수용자들의 문화를 변화시키지만, 수용자들의 문화도 종교에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이슬람 내에서 일어날 때 그것을 민속 이슬람이라고 부른다. 어떤 학자들은 민속 이슬람을 수피즘과 비정통주의 이슬람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요소가 발견되지만, 민속 이슬람은 비정통 이슬람과 수피즘과는 달리 쿠란이나 정통 이슬람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민속 이슬람은 정통 이슬람의 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전통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조건들이 요구하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점가된 형태의 성격을 가진다. 정통 이슬람이 신과 사후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한다면, 민속 이슬람은 지금 이곳에서 매일 직면하는 일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민속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알라를 믿고 따르지만 알라는 현실을 초월해 있다고 믿는다. 알라의 일은 인간 개개인의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며, 일상의 사소한 문제에는 관여하는 것은 다른 영적인 존재들의 몫이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이 세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이나 성인들이나 조상들의 혼령과 같은 영적 존재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들이 자신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개입한다고 믿는다. 특별히 민속 이슬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진(Jin)이라는 영적인 존재이다. 진은 지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인간처럼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죽는 존재로 설명된다. 진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민속 이슬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것이 민간 신앙이 아니라 쿠란과 하디스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속 이슬람을 이해하려면 쿠란에서 말하는 진(Jin)이라는 영적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 쿠란에 의하면 진은 인간과 함께 창조된 존재이며, 거의 대부분 인간과 함께 함께 언급된다(5 5:33). 인간이 알라에 의해 먼지로부터 창조된 반면(22:5), 진은 불로부터 창조되었다(15:27; 55:15). 쿠란에 의하면 악한 진들과 선한 진들이 다 존재하지만(72:11), 일반적으로 인간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악명 높다. 진은 성경에 나오는 악령과 전적으로 다른 존재이고, 한국의 도깨비와 유사한 면도 있지만 그 보다는 훨씬 실제적이고 두려운 존재이다. 알리 유숩(A. Yusuf Ali)은 쿠란 6 장 100 절을 해석하면서 진의 존재를 이블리스(iblis: 사탄)와는 다른 존재이며, 영 또는 보이지 않는 힘을 지닌 인격적인 존재로 해석한다. 요약하자면 무슬림들은 진은 인간의 영역에 거하고 자신들의 담당 구역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겉모습을 변형하거나 사물에 들어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인간들을 시기하여 그들을 해칠 기회를 찾고 있다고 믿는다. 무슬림들은 이처럼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삶에 깊이 개입하고 해를 끼치는 진의 존재를 믿고 그들을 두려워하며, 진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민속 이슬람의 관행들은 그러한 믿음의 외부적인 표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투르크 무슬림들은 일상생활에서 민속 이슬람의 여러 형태들을 실행한다. 터키 사람들에게 쿠란과 이슬람 신앙에 대해 질문을 해보면 이들의 이슬람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아주 다양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알라가 위대하다고 고백하지만, 동시에 악한 영들이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슬람은 다른 종교와 달리 알라와 인간 사이에 그 어떤 중보자도 허락하지 않으며 필요하지도 않다고 자랑을 하지만, 살아 있는 성인들을 찾거나, 죽은 성인들의 무덤이 곳곳에 널려있고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와 같이 정통 이슬람의 관점에서 보면 용인되기 어려운 민속적이고 미신적인 종교적인 행위가 터키 무슬림들의 일상적인 삶 가운데 폭넓게 자리를 잡고 실행되고 있다.


터키 민속 이슬람은 기본적인 성격에 있어서 다른 이슬람 사회들에서 볼 수 있는 민속 이슬람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민속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쿠란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보다는 현실의 필요를 채우는데 관심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평화, 관용을 강조하고 이방인들과의 마찰보다는 협력과 공생을 강조하는 성향을 보인다. 둘째 민속 이슬람의 추종자들의 대부분은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나 여자들이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쿠란을 스스로 읽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정통 신앙을 벗어나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며, 조상들이 행해오던 민속 이슬람의 관 행들을 따르는 것이 이슬람을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 교육 수준이 낮고, 이슬람법에 따라 이슬람 사원에 가는 것이 제한되어 있는 여성들의 대부분이 민속 이슬람을 신봉한다. 민속 이슬람은 이들 무슬림 여성들에 의해서 강화되고 재생산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슬림 어머니들은 가정에서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나 자신의 경험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행함으로서 민속 이슬람을 다음 세대에 전수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통점과 함께 투르크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민속 이슬람의 형태들이 있는데, 그것은 성인들에 대한 존경과 숭배이다. 성인숭배 의식은 모든 이슬람 사회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며, 성인으로 여겨지는 무슬림 지도자들은 실제로 어떤 신비적인 능력을 행하고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투르크 이슬람에서 성자숭배가 특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앞 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슬람 수용 과정에서부터 시작된 투르크 민족의 전통적 성인 숭배 문화의 영향 때문이다. 터키 전역에는 매일 사람들이 방문하는 수많은 성인들과 성인들의 무덤들이 존재한다. 투르베(Türbe)라고 불리는 성인들의 무덤뿐만 아니라 타리카트(Tarikat)의 지도자인 셰히(Şeyh)와 같이 살아있는 성인들로 추앙을 받는 사람들도 터키 민속 이슬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인숭배에 기초한 타리카트 이슬람이 터키뿐만 아니라 발칸 지역과 중앙 아시 아의 투르크 무슬림 공동체들에서 이슬람 이해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터키 민속 이슬람에는 중앙 아시아적인 요소 외에도 아나톨리아적이고, 중동적인 요소들이 복합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터키인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행해지고 있는 민속 이슬람의 관행에는 성인숭배, 부적, 주술적 언어들, 주술 그리고 축사와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형태들을 살펴보면 터키 민속 이슬람의 성격과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터키 전역에는 터키인들이 매일 참배하는 수많은 성인들의 무덤이 존재한다. 정통 이슬람에서는 반이슬람적인 미신적인 관습으로 규정하고 엄격하게 금지하지만, 수많은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소원이 이루어 지거나 문제가 해결되도록 성인들의 무덤을 잦아가 참배하고 기도한다. 성인들의 무덤을 참배하고 기도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소원이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효험이 있다고 알려지면 실제적으로 생전에 성인으로 추앙 받던 이슬람지도자들의 무덤뿐만 아니라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무덤들이나, 황제의 무덤들도 참배의 대상이 된다. 성인들의 무덤은 각각 다른 영역에 효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성인의 무덤은 불임한 여성들에게 효험이 있고, 어떤 무덤은 사업의 성공이나 부자가 되는데 효험이 있는 식이다. 따라서 성취하기 위한 소원의 종류나 해결하기 위한 문제의 성격에 따라 참배하는 무덤도 달라지고 의식의 형태 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


정통 이슬람에서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하고 있지만 일반 무슬림들이 그러한 행위를 중단하지 않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쿠란에 성인숭배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기 때문이다. 쿠란의 17:33, 27:53 등과 같은 구절들에는 왈리(wali) 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알라와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개념이 성인숭배로 발전했는데, 그것은 알라와 근접해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을 특별한 존재들로 여겼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은 특별한 능력을 행하거나 황홀경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은 알라에게 특별히 근접해 있는 성인으로 여긴다. 이슬람에서 전해 내려오는 문서는 무슬림 성인 아슬란(Arslan)이 한 시간 동안 4 계절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고, 어떤 성인은 병을 치료하고 사자를 타고 다녔다고 전한다. 터키에서도 그러한 문서들이 전해오는데 그 가운데 하저 벡타쉬(Hacı Bektaş)가 물로서 포도주를 만들거나 벽을 걸어 다니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성인숭배는 쿠란의 왈리의 개념과 함께 사후에도 인간의 영혼은 계속 살아 존재한다는 이슬람 신앙과 연관이 있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은 사후세계에서 계속 활동할 뿐만 아니라 꿈을 통해 살아있는 사람들과 접촉한다고 생각한다. 터키인들은 종종 죽은 조상들이나 가까운 친척들이 꿈에 나타나 알려준 일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 자신들을 도우고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이러한 믿음은 생전 알라와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특별한 능력을 행했던 성인들이 사후에도 여전히 그러한 능력을 행하므로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성인숭배에 대한 민간 신앙은 성인들의 무덤을 참배 했던 사람들의 경험담을 통해 강화된다. 성인들의 무덤에서 했던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기본이고, 성인들의 무덤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았거나 경험했다는 주장이 떠돌아다닌다. 그들이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인들의 목소리나, 환영 그리고 독특한 느낌들로 구성된다.


성인숭배를 죄로 규정하는 정통 무슬림들은 그러한 주장을 개인적인 환각이나 환청 등으로 치부하거나, 무슬림들을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귀신의 속임수로 설명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전통 이슬람의 해석보다 그러한 경험을 하고 자신들의 소원이 성취되었다는 이웃이나 친구들의 말을 더 신뢰한다. 이들에게는 이슬람의 건조한 교리보다는 현실적인 필요와 생생한 이웃들의 경험이 더 가깝고 실제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년 입시철이 되면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는데 효험이 있다고 알려진 무덤들은 참배객들로 인해 발붙일 틈도 없을 만큼 붐빈다. 터키 종교청은 이런 행위가 이슬람에 위배되는 것임을 알리고 주의시키지만 종교청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입시생을 둔 부모들이 성인들의 무덤에서 하는 행위들을 살펴보면 기도와 함께 촛불 켜기, 무덤에 작은 돌을 붙이기, 연필과 지우게 붙이기 그리고 쌀이나 사탕을 가지고 가서 기도한 후 시험에 들어가는 자녀들에게 먹이기와 같은 이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행위들은 한국의 입시 때 일어나는 것과 이주 유사한 형태의 것으로 보인다. 자녀들의 입시를 위해 기도했던 무슬림들에게 질문해보면 보면 그들 역시 이슬람은 알라에게만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성인들의 무덤을 방문해서 기도한 것은 무덤에 있는 성인들의 도움을 얻어 알라에게 기도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대부분의 터키 무슬림들은 성인들의 무덤에서 한 자신들의 기도를 알라가 들어주는 것은 성자들이 이 전에 행했던 선한 일들을 기억하고 받아주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터키인들은 또한 정통 이슬람에서는 금지하고 있지만 무스카(Muska) 또는 투마르(Tumar)라고 불리는 부적들을 사용한다. 부적은 다른 이슬람 사회들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터키인들이 사용하는 부적은 특정한 쿠란의 구절들이나 기도문 또는 알라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가죽 또는 금색, 은색 천으로 만들어진 삼각형이나 사각형 모양의 작은 주머니에 넣은 형태로 목에 걸거나 팔에 묶어 지니고 다닌다. 이렇게 함으로서 악한 영으로부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병이나 재앙 그리고 액을 미리 예방하며 병중에 있는 사람이 조속한 회복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부적을 사용하는 목적이 예기치 못한 두려운 일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아랍어를 식별하지 못하는 터키인들에게 부적의 내용은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부적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부적의 내용이 무엇인지 질문하면 잘 모른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다. 그래서 부적에는 선지자나 천사 심지어 신화적인 인물의 이름들이나 주문들, 별과 같은 상징적 표시, 숫자, 동물그림들도 사용된다. 부적은 길가에서 팔기도 하고, 점치는 사람이 그려 주기도하며 심지어 이맘들 가운데서도 부적을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


터키 사람들은 몸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 외에 사람의 눈 같이 생긴 '마비본죽(Mavi Boncuk)’ 또는 '나자르 본 죽(Nazar Boncuk)’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부적을 즐겨 사용한다. 나자르(nazar)라는 말은 아랍어로 '눈’ 또는 '시선'이라는 의미에서 온 것으로, 해를 끼치는 나쁜 시선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한국어로 '액'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그리고 본죽(boncuk)은 구슬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자르 본죽은 '액을 막는 구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자르 본죽은 대부분 파 란색을 띠고 있어 '마비 본죽'(파란 구슬)으로도 불리는 데, 파란색이 사용되는 것은 파란 색깔이 액을 막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슬 안의 눈동자도 민간에서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납을 부어 넣어 만든다. 터키 사람들은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나자르 본죽이 좋은 일에 시샘을 하려고 엿보는 악한 영의 기운(액)을 막아준다고 믿는다. 이집트와 같은 아랍 국가들에서는 나자르 본죽이 '파트마의 눈’이라고 불린다. 터키뿐만 아니라 중동의 여러 나라들에서 액을 막기 위해 사용되는 나자르 본죽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지만 이슬람 이전 중동지역에서 민간신앙의 형태로 사용되었던 것이 이슬람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터키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건물, 가게, 자 동차, 장신구, 어린아이의 옷 등 거의 모든 곳에서 나자르 본죽을 볼 수 있다. 터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이 새 집으로 이사를 가거나 개업을 했을 때, 새 자동차를 구입했거나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자르 본죽을 선물 한다. 나자르 본죽이 병이나 불운 그리고 사고들과 같은 나쁜 일들을 물리치는데 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 이다. 그러나 악령을 막기 위한 사전 조치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그들을 달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터키 사람들은 흔히 원인이 분명하지 않는 질병을 앓거나 좋지 않는 일들이 생기면 악령을 달래기 위해 희생제물을 바치기도 한다.


대부분의 터키 무슬림들은 질병은 자연적으로 발생지만 영적인 힘에 의해서도 발생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현대의학이 육체적 질병의 치료책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현대 의학과 함께 전통적인 방법에도 의존한다. 특별히 농촌 사람들이나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일수록 현대의 의학적 방법이나 약물이 증상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병의 원인은 치료할 수 없다고 믿는다. 질병을 유발한 근원이 영적인 요소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생각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나 가족이 병에 걸리면 이맘이나 치유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성인들의 무덤을 찾아간다. 이슬람 이맘들은 자신들을 찾아오는 병자들에게 병의 영적인 원인을 진단해주고 기도를 하거나 쿠란의 구절을 적어주는 것과 같은 적절한 치료책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은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환자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한 방법을 통해 치유를 받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은 -실제로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 민속 이슬람 신앙을 재생산하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질병은 아니지만 불임도 무슬림 여성들을 민속 이슬람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가부장적 사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불임은 무슬림 여성들에게 엄청난 문제였다. 일부다처제의 이슬람 사회에서 여인이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명예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래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불임에 대한 원인이 규명되고 적절한 치료방법이 사용되고 있는 현대에도, 불임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를 갖지 못한 여성들은 불임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지는 성인들의 무덤이나 장소, 사물 들을 찾아 기도를 하거나 주술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3) 신비주의 수피 이슬람


이슬람에서는 신비주의를 수피즘(Sufism) 이라고 부른다. 아랍어에서 유래한 이 말이 어디서 기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이슬람 학자들은 수피즘이 아랍어 양털을 뜻하는 수프(suf)에서 유래했다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터키 이슬람 신학자 이브라힘 추북추(İbrahim A. Çubukçu)는 신비주의가 수피즘으로 불리게 된 것은 아랍인들이 양털 옷을 입은 사 람들을(Sufi) 신비주의자(tasavvafa)로 불렀는데, 그들은 알라의 길을 추구하는 금욕적이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 설명한다. 무슬림 신비주의자들이 거친 양털을 입고 다닌 이유는 양 냄새가 풍기고 불편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세상의 것으로부터 단절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양털로 만든 옷을 입고 다녔던 선지자들의 전통을 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수피즘은 모든 이슬람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이슬람 해석이며 하나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터키 수피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피즘의 일반적인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터키 수피즘은 일반적인 수피즘에 터키적인 요소가 첨가되고 혼합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경전 중심적이고 율법 중심적인 이슬람에서 신비주의가 발생하게 된 이유는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내적인 요인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종교와 정치가 일치하는 이슬람에서 정치적 타락이다. 이슬람이 성공하자 무슬림 통치자들이 권력에 부패해 이슬람의 이념에서 떠나게 되자 이에 환멸을 느낀 무슬림 지도자들이 세속적인 추구를 버리고 알라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길을 나섰다. 두번째로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율법주의적인 성격에 대한 반동이다. 무슬림 학자들은 오랜 기간 율법주의 논쟁을 계속했다. 여기에 환멸과 영적인 메마름을 느낀 무슬림들은 알라에 대해 논쟁하기보다 알라를 직접 경험하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러한 열망이 수피들을 탄생시켰다. 마지막으로는 알라를 경험하려는 그러한 열망을 합법화할 수 있는 이슬람의 전통이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알라와 직접적인 접촉을 하는 경험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일 무함마드가 그러한 경험을 했다면, 다른 무슬림들도 그러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도 합법화 될 수 있다. 오히려 모든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삶의 표준인 무함마드처럼 알라와 직접적인 체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수피즘이 발생하게 된 외적인 요인으로는 당시 중동의 여러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수도원들과 수도사들을 들 수 있다. 이슬람 학자 마이클 나지르 알리도 수피는 무슬림들이 중동의 기독교 수도원 제도에서 자극을 받아 발전되었다고 설명한다. 사실 알라의 99 가지 이름 가운데서, '사랑’이 존재하지 않고, '이슬람의 알라는 사랑일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정통 무슬림학자들에게 알라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복종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피들의 사상에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알라의 사랑’에는 기독교적인 정취가 물신 풍긴다. 수피즘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었다. 지역이나 분파에 따라서 금욕주의와 신비주의의 연합적인 성격에 접신 신학적인 요소가 도입되었고, 어떤 종파에서는 수피즘이 범신론적인 성격으로 이해된다.


오늘날 수피즘은 춤, 음악, 황홀경, 종교적 환각상태에 몰입 등과 같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최근 이슬람 사회들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수피즘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러한 관심을 반영하듯 유네스코는 2007년을 메블라나(Mevlana)의 해로 선포하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메블라나는 터키 수피즘을 대표하는 종파의 창시자이다. 이슬람 사회나 서구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이 수피즘에 새로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영성의 폭발'로 설명되는 현대적 종교 현상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이슬람 사회는 세계화에 편입되면서 많은 무슬림들이 공동체의 와해로 인한 개인화, 도시화, 상업화, 비인간화 등으로 많은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갈증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갈증을 느끼는 무슬림들 가운데 상당수는 율법주의적이고 내세 지향적인 정통 이슬람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황홀경과 알라를 경험하는 것과 같은 신비적이고 영적인 체험을 통해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수피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종교 지도자들이나 정치 지도자들의 수피즘에 대한 지원도 수피즘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데 한 몫 한다. 정치 지도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수피즘을 지원하는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때문에 망가지 이슬람의 이미지를 사랑과 관용 그리고 보편적 인류애를 강조하는 수피즘을 내세워 만회해 보려는 의도 때문이다.


터키 수피즘에는 수피즘의 일반적인 성격과 터키의 전통적 성격이 혼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터키인들이 수피즘을 수용한 것은 아랍 무슬림처럼 일차적으로 이슬람 율법이 가지는 건조함이나 이슬람의 부패에 대한 반동 때문이 아니라 이슬람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상황화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터키 수피즘에는 이슬람 이전 투르크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인숭배와 범신론과 같은 민속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특별히 이슬람 이전 중앙아시아 투르크인들 가운데 영향력을 행사하던 범신론적인 요소는 비정통 이슬람 계통의 수피즘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투르크인들이 수피즘 형식의 이슬람을 수용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아흐맷 예세비(Ahmed-i yesevi)로 알려져 있다.


터키 수피즘의 창시자이며,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아흐맷 예세비(1093~1167)는 투르크인들의 이슬람 수용과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의 이슬람 해석은 오늘 날 터키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부터 발칸반도의 서쪽 끝 코소보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투르크인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아흐맷 예세비를 이해하는 것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수용과정뿐만 아니라 범 터키인들의 이슬람을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 그의 본명은 Ahmet bin İbrahim bin İlyas Yesevi 로 1093 년 오늘 날 카자흐스탄 지역에 위치한, 당시 중앙아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지 중의 한 곳이었던 사이람(Sayram)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부친 사후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던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 유학해서 신비주의 이슬람 멜라메티-칼렌데리(Melametî-Kalenderî) 종파의 지도자로 알려진 유습 해메다니(Yusuf Hemedani)의 수하에서 수학했다.


아호맷 예세비의 스승이었던 유습 해메디니는 이란 수피즘을 대표하는 호라산 멜라메티예 학파(Horasan Melametiye)의 계열에 속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아흐맷 예세비 역시 종교적 영감을 알라의 징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기초한 율법주의적 묵상이 아니라, 신적인 사랑과 매력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관용을 강조하는 멜라메티예 학파의 수피즘 전통을 계 승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당시 투르크인들 가운데 이란 호라산 수피즘을 대표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이란의 수피즘을 계승하는데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이란 수피즘을 투르크인들의 전통과 신앙 그리고 삶의 방식과 혼합하여 투르크인들이 쉽게 이슬람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길을 열고자 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흔적은 그가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에 능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터키어로만 작품들을 남겼다는 사실에서도 발견 된다.


아흐맷 예세비가 채택한 방법은 투르크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어 이슬람이 빠른 속도로 확장되었다. 그의 생전과 그의 사후에 예세비 종파로 알려진 그의 제자들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수피즘 이슬람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투르크 이슬람은 아랍적이지도, 이슬람 이전의 투르크적이지도 아닌 양자가 혼합되고 종합된 독특한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 아흐맷 예세비의 영향력은 지금도 카자흐스탄에서 투르크메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투르크인들의 이슬람 이해에 강하게 남아있다.


아흐맷 예세비의 수피즘은 그의 이름으로 전해오는 문헌들을 통해 부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이름으로 전해오는 문헌들이 실제로는 그가 직접 기록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의 이름으로 전해오는 문헌은 Divan-ı Hikmet (잠언집)을 비롯해 Fakrname(가난을 통해 오직 신에게만 의존하며 나아가는 길에 대한 가르침)와 Risale(단편) 등 세 가지이다. 터키 역사학자들과 이슬람 학자들은 이 세 작품의 내용이 서로 중복되어있고, 내용에 있어서 한편으로 수피즘을 찬양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수피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샤리아법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아흐맷 예세비에 의해서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더구나 번역본 가운데 17 세기 이전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그의 저작들은 그의 사후 그를 추종하던 예세비 종파에 속한 수피 공동체가 기록한 것으로 추즉된다.


비록 예세비의 이름으로 된 저작들이 실제 그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를 추종하던 이슬람에 대한 그의 해석과 사상이 그 속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Divan-ı Hikmet 에서 나타나는 수피즘의 주제들이 12 세기 이후 등장하는 중앙아시아와 아나톨리아지역의 거의 모든 수피즘 종파들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수피즘의 주제들은 터키 수피즘 종파들인 하저 벡타셔와 메블라나의 사상적 기초를 이룰 뿐만 아니라 정통 순니 이슬람 학자들의 이슬람 해석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책의 내용은 신적인 사랑, 전능한 힘과 능력, 무함마드 선지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의 중요성, 심판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조망 그리고 인류애 등과 같이 수피 이슬람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과 예세비 종파의 규례와 지도자들의 가르침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가운데 가장 강조되는 주제는 신에 대한 사랑과 인류애라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사람과 인류애는 하저 벡타셔와 메블라나 사상과 신학의 백미를 구성하는 것이다.


아흐맷 예세비의 이슬람 해석이 아나톨리아에 전파 되어 오늘 날 터키 수피즘의 근간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12 세기 몽골의 중앙아시아 침공과 때를 같이한다.


몽골의 중앙아시아 침략을 피해 아나톨리아로 유입된 예세비파 수피 탁발승들은 이교도의 침략으로 유린된 무슬림들에게 초월적이고 신적인 경험을 추구하도록 함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참아낼 수 있는 신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메블라나와 하저 벡타셔 역시 고라산 지역에서 아나톨리아로 이주해온 수피 무리들 가운데 속해 있었다. 메블라나와 하저 벡타셔의 가르침은 몽골이라는 강력한 이교 침략자들에게 맞서 승산이 없는 싸움을 벌이는 것보다 초월적이고 인간 내면의 문제를 추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본 사람들의 사이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4) 타리카트 이슬람 : 경전 이슬람과 신비주의 이슬람의 종합


중앙아시아와 터키에는 타리카트(Tarikat)라고 불리는 많은 이슬람 분파들이 존재한다. 터키어 타리카트라는 말은 아랍어 tarik 에서 온 말로, '신에게 도달하는 지식을 얻는 길(道)’ 또는 '신에게 이르는 길’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통 이슬람에서 신에 대한 지식을 얻는 유일한 길은 쿠란과 하디스이다. 이것은 곧 무함마드의 길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다른 어떠한 해석이 덧붙여질 수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 무슬림들은 정통 순니들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에 의하면 쿠란과 하디스에서 문자적으로 드러난 의미는 배우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 종교에는 감추인 의미가 있는데, 그러한 지식은 대가들의 해석에 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감추어진 의미는 지식의 다양한 지식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이슬람 세계에 수많은 타리카트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슬람 세계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수많은 타리카트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특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슬람 학자들에게서 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터키에는 최소 192 개의 타리카트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터키인들이 이슬람 역사만큼이나 오래 동안 터키인들과 함께했다. 그래서 터키 이슬람 학자들은 타리카트에 대한 이해 없이 터키 이슬람을 논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 외부인이 타리카트를 이해하는 것은 신학과 사상의 다양함과 외부에 폐쇄된 구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 중앙아시아와 터키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대표적인 종파를 살펴보는 것은 투르크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슬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타리카트는 수피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투르크인들은 공식적으로는 순니 이슬람을 표방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수피 종파나 타리카트를 선호하는 것은 앞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투르크인들의 의식과 마음 속에는 신비주의적인 성향과 지향점이 있기 때문이다. 터키 정통 무슬림들은 내면에 초월적이고 신적인 것을 경험하고자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많은 순니 무슬림들은 모스크에서 행해지는 일반적인 종교적인 의식이 자신들의 정서와 감정 그리고 마음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한다고 느끼며, 그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경험하기를 원한다. 현대 터키 건국 후 1925 년 아타투르크가 테케 (Tekke)들을 폐쇄시키고 타리카트들의 활동을 금지시켰지만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현재에도 타리카트 이슬람주의자들과 아타투르크를 따르는 세속주의자들 사이에 이데올로기적 긴장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이 타리카트를 지지하는 것은 자신들의 영적인 필요성을 이들이 중족시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리카트의 신비적이고 유연한 성격 역시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계층으로부터 다양한 사람들을 수용하도록 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오늘 날 터키의 타리카트들은 특유의 조직력과 지도자의 신비적 카리스마 덕분에 수많은 대중을 확보하고 있으며, 정치, 경제, 교육 부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은 앞으로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터키 타리카트들의 대부분은 외부에서 유입되었거나 혹은 이들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들이다. 그러므로 터키 타리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슬람에서 타리카트가 발생하게 된 원인과 배경을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타리카트의 기원과 역사적 발전과정


타리카트 창시자들은 신비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쿠란과 하디스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무슬림들이었다. 이슬람에 의하면 쿠란과 하디스로부터 알라의 율법인 샤리아가 도출된다. 샤리아라는 단어는 '오아시스로 가는 길'을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통 무슬림들에게 샤리아는 '무함마드의 길'을 의미하지만, 신비주의 수피들에게 그것은 인류가 알라에게 도달하기 위하여 따라 걸어야할 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슬람에서 신비주의자가 생겨난 것은 이슬람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신비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알라를 경험하고, 꿈 혹은 환상가운데 예루살렘을 여행한 무함마드 자신이 신비적이었고 그의 추종자들도 그것을 따랐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인 것을 지향하는 경향은 이슬람이 확장 되면서 이슬람의 정통적 기반에 애니미즘, 오컬트 그리고 신비주의적 내용이 혼합되면서 개종자들의 종교적 유산과 뒤섞이게 되었다. 초기의 정통 신비주의는 주로 신에 대한 두려움에 기초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죄에 대한 인식과 신의 징벌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한 두려움으로 인해 신비주의자들은 전적으로 알라의 뜻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다. 두려움에 대한 그러한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과의 친밀함과 사랑에 기초한 자유와 해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9 세기를 전후하여 무슬림들은 기존의 고착화된 의식들을 탈피하여 명상의 신비함을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신비주의 무슬림들은 이 명상이 율법적 체계에 있어서 아주 조직적이었지만 아무런 생동감이 없이 고백했던 알라를 실제적으로 알아 가는데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9 세기에 이슬람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에는 기독교 신비주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초기 수피즘의 금욕적이고 명상적 경향들은 북아프리카와 시리아 기독교인들 가운데 발견되어지는 신비적 교리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기록된 수피들의 저술들에는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신약성경 복음서의 내용들과 예수님의 묵시적 언급들이 발견된다. 기독교 영지주의 신학의 내용이 이슬람 수피들의 저술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무슬림 금욕주의자들이 영지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비주의 타리카트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가장 위대한 이슬람 신학자요 수피 중의 한 사람 이었던 알 가잘리(Al-Gazzali: 1058-1111))의 신비주의로의 전환이었다. 그는 11 세기에 가장 뛰어난 이슬람 신학자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알라의 면전에서 전적으로 무가치함을 느끼게 되었고 지옥을 벗어나 천국의 보증을 얻기를 소망하면서 금욕적이고 유랑적인 삶의 방식을 수행하였다. 그는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회의주의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종교적 진리는 이성이나 철학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관으로 얻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분명한 진리는 감각이나 사고가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만 볼 수 있고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성과 신앙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들은 오직 신비에 의해서만 해결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자신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수피즘에 막대한 영 향력을 끼치고 있다.


11 세기 중반 즈음에 수피즘에 최소한 12 개 이상의 분파가 있었다. 10 개 분파는 정통 순니 계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2 개는 이단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분파들은 유명했던 설립자들의 이름을 따라서 명명 되어졌다. 수피 무슬림들에 의하면 그 길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일한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었다. 그래서 수피들은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길을 찾아 따르려고 하였다. 타리카트들은 그러한 신앙적 분위기 가운데 증가하였다. 수피 단체들은 처음에 한 지도자와 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어서 이러한 수피 단체들은 새로운 스승이나 리더를 중심으로 더 많은 하부단체들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하부단체들은 다시 더 하부단체들로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13 세기에 터키 타리카트들이 발흥하기 시작한 고전적인 수피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4 세기에 타리카트들은 포교활동으로 나설 준비가 되었다. 무슬림 군대가 진군할 때 수피 군인들과 사제 그리고 상인들도 그들과 함께하였다. 포교활동은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이슬람적인 원료에 지역적인 요소들이 혼합되는 것을 허용하였다. 중요한 것은 알라와의 의미 있는 개인적 만남의 경험이었다. 그래서 터키인들이 타리카트의 회원이 되었을 때 그들이 이전에 사용하던 종교적 의식들을 계속 유지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터키가 타리카트들의 무대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원래 타리카트는 자신의 길을 발견한 한 대가(mursid)와 그의 주위에 모여든 제자들로(murid) 구성된 한 작은 그룹으로 출발하였다. 작은 규모의 그룹에서는 타리카트의 대가가 각각의 제자를 훈련시키고 감독을 할 수 있었으며 훈련의 내용이나 방법도 제자들의 개인적 필요에 맞게 조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타리카트들은 몇 가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타리카트 지도자들의 명성이 높아지고 제자가 되기 위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지도자가 그들을 각각 개인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타리카트들은 새로운 훈련 체계를 고안해 내었다. 새로 고안된 체계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제자의 선별방식이었다. 타리카트들은 제자가 되기 위해 지원하는 사람들이 일정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해야만 입회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선별 방법은 새로운 제자들의 수를 적정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둘째는 한 지도자가 각각의 제자들의 필요에 따라 그에게 맞는 훈련을 조율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제자들이 각 타리카트에 의해 결정된 영적훈련의 규율에 자신을 맞추어 가도록한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제자의 선별과정과 영적훈련의 의식과 규율과 절차는 더욱 세분화되고 체계화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타리카트에게 일어난 또 다른 변화는 타리카트들 사이에서의 경쟁으로 인한 것이었다. 타리카트의 수가 증가하고 또한 지역에서 발생한 타리카트들이 다른 지역으로 퍼져가면서 타리카트들 사이에서 더 많은 신봉자를 얻으려는 경쟁이 일어났다. 그러한 경쟁은 자연스럽게 창시자들에 의해서 제시된 영적지침과 규율의 질적인 저하를 유발하였다. 원래 타리카트가 지향했던 목표와 형태들이 느슨해지고 새로운 의식들과 사상들이 타리카트에 도입되었다. 많은 지도자들이 길을 발견한 사람의 차원을 넘어 특별한 존재로 부각되었다. 지도자들의 영적인 자질은 경외의 대상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경향은 지도자들을 보통 사람과는 다른 성인의 신분으로 상승시켰다. 이제 그들은 알라와의 특별한 관계에 의해서 신비하고 성스러운 능력을 소유한 비판을 초월한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알라는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영적인 은사를 부여한다는 이념에 정면으로 반대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영적인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들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타리카트의 지도자들이 성인화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권위와 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의복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초기의 수피들은 양털을 입는 것을 순수한 금욕주의의 한 표시로 가르치는 하디스에 따라 양털 옷을 입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외모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강조하고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러나 타리카트들은 복장을 통하여 다른 그룹과 차별화하고 일반인들과는 다른 권위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초기의 이념을 파기하였다. 각각의 타리카트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수도승 모자를 착용하게 되었다. 타리카트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한 13 세기 동안에 모자와 테두리 끈과 함께 외투와 허리띠가 대부분의 수피들의 특징을 이루는 구성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중에도 초창기의 이념들을 유지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들이 있었지만 결국 대중성 확보를 위한 대가로 설립자들의 이념을 희석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 터키 타리카트들은 대중적인 인기와 그에 따르는 성공을 얻었지만 원래의 이념과 목표에서는 멀어지고 단지 현대적인 개인적 영성의 추구라는 존재이유만 남게 되었다.

 


낙쉬벤디(Nakşibendi) 타리카트


중앙아시아와 터키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는 타리카트는 낙쉬벤디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낙쉬벤디 타리카트의 이슬람에 대한 해석과 실천을 이해하는 것은 중앙아시아와 터키의 이슬람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낙쉬벤디 타리카트는 메흐메드 바하에띤 낙쉬벤드 (Mehmed Bahaeddin Nakşibend)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그는 1318 년 부하라 근처 카스르 아리판(Kasrı Arifan) 에서 출생하여 1391 년 같은 곳에서 죽었다. 그가 처음으로 접촉한 수피 타리카트는 그 지역에서 발흥하여 당시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예세비 분파였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이전에 살펴본 예세비의 가르침을 따라 쿠란, 하디스, 이슬람법 그리고 수피즘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이후 정통 순니파의 가르침에 더 무게를 둔 자신의 길을 추구했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낙쉬 벤디 타리카트를 설립했다. 낙쉬벤디 분파는 알라의 이름을 소리를 내지 않고 암송하며, 알라를 위해 행해지는 모든 것을 예배로 여긴다. 그래서 낙쉬벤디들은 정치나 경제활동과 같은 영역들에 활발히 참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타리카트는 17 개의 분파로 나뉘어 이슬람 세계에서 활동 중이다. 이들 가운데 눌주 분파 (Nurculuk)와 술레이만저 분파(Süleymancılık)는 터키를 대표하는 낙쉬벤디 타리카트를 분파들이다.


이 두 분파 가운데 눌주 분파는 현대 이슬람을 다루는 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눌주 타리카트는 비교적 최근에 터키에서 발흥하여 현대화한 터키 이슬람을 대표하는 타리카트이다. 터키와 중앙아시아를 넘어서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페툴라 귤렌 회도 눌주 타리카트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래서 이 단체는 터키인들이 현대라는 상황에서 이슬람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혹은 이슬람의 관점에서 현대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표본의 역할을 한다.


낙쉬벤디 타리카트를 아나톨리아에 소개한 사람은 세흐 일라히 (Seyh Ilahi)로 시마브(Simav)에서 출생하여 1490 년까지 활동했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이슬람 교육을 받고 활동했으며 수피 타리카트들의 본산지인 호라산, 사마르칸트 등을 여행하며 수피즘을 공부했다. 이 기간 동안 낙쉬벤디의 창시자인 메흐메드 바하에띤 낙쉬벤드의 무덤 근처에 머물었으며, 아나톨리아로 돌아온 이후에 먼저 고향인 시마브에 낙쉬벤디 테케를 열었고 이후 이스탄불에도 테케를 열고 활동하였다.


낙쉬벤디 타리카트는 바하에띤에 의해서 설립된 이후 여러 번의 사상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런 변화는 외부의 환경이나 새로운 종교적인 가르침에 개방되어 있는 수피 타리카트들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바하에띤의 이슬람 해석은 인도로 전파되어 아흐맷 실힌디(Ahmet Sirhindi: 1563-1625)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다. 실힌디는 낙쉬벤디 타리카트의 핵심적인 사상을 정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슬람에서 무함마드와 하디스 이후에 첨가된 내용(bidatlar)을 제거하고 이슬람 공동체를 혁신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그의 가르침은 낙쉬벤디 타리카트의 사상의 무게 중심이 수피 신비주의에서 정통 순니 이슬람 쪽으로 움직이게 했고, 이후에도 그러한 경향은 변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실힌디는 또한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현세와 영원한 내세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회와 정치 참여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현실에 대한 이러한 그의 사상은 낙쉬벤디 타리카트의 8 가지 기본 원리 가운데 하나인 ‘군중 가운데서 고고함' (halvet der enümen)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원리는 내면적으로는 알라에 집중하면서 외면적으로는 사회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낙쉬벤디들은 다른 수피 종파들과는 달리 외부 환경에서 벗어나 내면의 세계로 도피하거나 사회의 문제들에 소극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실힌디가 낙쉬벤디 타리카트에 남긴 또 다른 중요한 사상은 '전통의 혁신’이다. 그는 이슬람 공동체의 혁신을 위해서 이전의 전통들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에 따라 자신도 낙쉬벤디의 전통들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그것을 책으로 남겼다. 실힌디의 이슬람 전통에 대한 재해석, 혹은 시대에 맞는 혁신에 대한 강조는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따라가야 할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낙쉬벤드들이 오스만제국 말기와 터키 독립전쟁에서 보여 준 활동들과 현대 터키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제반 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 배경에는 그러한 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지데 알비 (Sacide Alvi)는 19 세기 이슬람 현대화 운동과 20 세기 현대 이슬람 주의의 선봉에서 활약한 사람들은 바로 실힌디의 혁신 (tecdid)의 전통을 따르는 자들이었다고 말한다.


낙쉬벤디 타리카트는 19 세기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겪었다. 터키 낙쉬벤디의 현재의 모습을 형성한 19세기의 변화의 원인은 이슬람 세계가 겪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었고, 변화의 중심에는 메블라나 할리드 바아다디(Mevlana Halid-i Bağdadi:1776-1827)가 있었다. 할리드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이 몰락의 길을 걷고 이슬람 사회는 서구 열강으로부터 위협을 받자 그에 대응하기 위해 실힌디의 전통을 따라 타리카트의 교리적인 내용을 새롭게 해석했다. 할리드는 바그다드에서 태어나 인도에서 이슬람 전사로 활약했던 낙쉬 벤디 압둘라 데흐레비(Abdullah Dehlevi)로부터 수학하고 그로부터 오스만제국의 대표로 임명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타리카트를 세웠다. 그는 실힌디가 했던 것처럼 무슬림 공동체가 전체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해결책으로 순나와 샤리아의 복원을 제시했다. 그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이슬람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 사람들의 영향과 오스만 제국의 무기력이었다. 그에게서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이슬람 공동체들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고 그것은 공동체를 통치하는 지도자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과 낙쉬벤디 타리카트의 지도자들의 사명은 통치자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들로 하여금 샤리아법을 따르게 하는 것이라 믿었다. 할리 드와 그를 따르는 낙쉬벤드들의 활동은 오스만제국의 통치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피 타리카트임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에 그러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적으로는 정통 순니파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정치적 의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낙쉬벤드 타리카트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정부 역시 비정통 이슬람의 세력 확장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스탄불의 울레마들 역시도 시아파 수피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벡타쉬들과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리드의 정치적 활동은 정치, 종교지도자 모두로부터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낙쉬벤디 타리카트가 오스만 제국 말기 영향력을 확대시킨 것은 단지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또한 일반 대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9 세기 전반에 걸쳐 종교를 중요시하던 교육받은 무슬림들은 낙쉬벤디 타리카트의 대가들을 자신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그 대가들의 이슬람 해석을 따랐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낙쉬벤디 타리카트의 회원이 되었다.


낙쉬벤디가 이처럼 사회의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호응을 받고 그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낙쉬벤디 지도자들은 오스만 제국 말기 서구의 정치, 군사, 경제 그리고 종교적 공세에 맞서 모든 무슬림들에게 국가의 안영을 위해 기도할 것과 기독교와 시아파 이슬람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행동할 것을 호소했다. 이러한 활동은 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던 이슬람 사회를 회생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 중이던 지배계층과 지식인 그리고 중소 상공인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 내었고, 낙쉬벤디 타리카트가 외세에 대응하여 투쟁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로 부각되었다. 1878 년 발발한 러시아-오스만 전쟁은 오스만 정부와 일반 무슬림들이 낙쉬벤디 타리카트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호의적인 감정을 더욱 강화시켰다. 낙쉬벤디 지도자들은 전쟁이 발발하자 신속하게 조국애와 민족수호와 같은 현대적인 개념들을 수용하였다. 한 구체적인 예로, 규뮤쉬하네비 (Gümüşhanevi) 분파는 조국과 이슬람과 국가의 수호를 위해 회원들에게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라고 권고하였다. 그 이후에도 낙쉬벤디들은 종교적인 결속을 통해 외세에 대항하는 운동을 계속적으로 전개해 나갔고, 무기력한 제국의 통치자들로부터 아무런 보호와 도음을 받지 못하던 국민들은 이들을 자신의 이권을 대변하는 하나의 기관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활동의 결과 낙쉬벤디들은 오스만 제국의 말기에 제국 내에서 가장 크 고 영향력이 있는 이슬람 단체로 성장하였다. 현대 터키 공화국이 출범하기 직전인 1920 년 이스탄불에 있던 658 개의 수피 테케들 가운데 305 개가 낙쉬벤디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은 이 단체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이러한 수치는 모든 타리카트들의 테케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었다. 오늘 날에도 낙쉬벤디 타리카트의 여러 분파들은 정치, 경제를 비롯한 국가와 사회의 제반 분야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할리드가 주도한 낙쉬벤디 타리카트가 현재에도 터키의 종교와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이슬람에 대한 현대적 해석뿐만 아니라 견고한 조직 때문이기도 하다. 할리드는 상호보완적인 세 가지 축, 즉 관계(rabıta), 알라의 이름 암송(zikir) 그리고 지도자 (şeyh) 를 중심으로 자신이 형성한 공동체를 조직화했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을 고백하고 알 라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암송하면서(zikir) 깨끗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의식을 형성시키고 스스로 훈육하게 하며 자신을 새롭게 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모든 회원들은 지도자와 관계를 맺고(rabıta) 그의 인격과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보편적이고 참된 의식을 발견하고 따라야 한다. 현재 터키에서 활동 중인 낙쉬벤디 타리카트의 분파들은 모두 할리드 분파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낙쉬벤드 타리카트는 여러 번 사상적인 변화의 단계를 거쳤지만 기본적으로 순니 이슬람의 원리를 충실하게 따른다. 라마단 금식과 하루 다섯 번의 기도, 성지 순례, 구제(zakat)와 같은 이슬람의 기본 의무와 함께 알라의 이름을 암송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낙쉬벤디는 샤리아가 요구하는 규율들이 종교의 기본을 이루며 알라의 이름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것이 샤리아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알라의 이름을 입술에서 떠나지 않게 함으로 알라와 늘 함께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처럼 알라의 이름을 늘 암송 하는 사람은 모든 종류의 일시적인 욕망이나 세상의 것들로부터 벗어나 내면의 기쁨을 누리며 알라와 대면하게 되는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감각적 욕망을 억제하고 가능한 한 여인들을 가까이하지 말아야한다고 가르친다. 알라의 이름을 함께 부르는 의식은 "하템-이 하제간"(Hatem-i hacegan) 이라고 불리는데 테케나, 금 요 집회, 월요일에 잠자리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하는 기도시간 이후에 치러진다. 이 의식을 이끄는 지도자는 알라의 99 가지 이름 가운데 각 참가자에게 어떤 이름을 암송할 것인지를 알리고, 참가자들은 염주(tespih)를 돌리면서 속으로 알라의 이름을 옮조린다. 알라의 이름은 내면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읊조리는 것이 원칙이지만 제즈베(cezbe)에 빠져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한다.


낙쉬벤디는 분파에 따라 다양한 의식과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본원리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아래와 같은 8 가지의 기본원리를 가지고 있다:


1. 욕망에 대한 자각
2. 신중한 행동
3. 내면으로의 신비적 여행
4. 군중가운데서 고고함
5. 종교적 명상
6. 생각의 절제
7. 신중한 생각
8. 알라에게로의 집중

 

 

5) 국가주의 이슬람


국가주의 이슬람이란 이슬람 해석이 국가의 메커니즘 혹은 국가의 정치에 기초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슬람은 시초부터 종교와 정치, 종교와 사회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국가와 정치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이슬람이 우선이고 다음이 국가이다. 이것은 국가의 이념과 통치구조가 이슬람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국가주의 이슬람은 이런 전통적인 개념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이것과는 좀 더 다른 성격을 지닌다. 국가주의 이슬람에서는 국가의 이념 혹은 정치 권력이 종교를 우선한다. 다시 말해 국가의 정치권력이 이슬람을 주도하면서 국가의 이념에 따라 이슬람을 해석한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종교가 정치의 통제를 받게 된다. 물론 국민의 절대 다수가 무슬림인 국가에서 정치가 종교를 통제한다고 해서 이슬람의 근본적인 성격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이슬람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체제의 수호나 국론의 통일 그리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이슬람을 동원하는 것뿐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국가주의 이슬람에서는 두 가지 특징인 모습이 나타난다. 하나는 국가 없이는 이슬람도 없다는 공식을 세워서 국가가 합법적으로 이슬람의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통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가 종교를 통제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던 사람이나 단체들도 일단 정권을 잡게 되면 이슬람을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주의 이슬람이 강하게 나타나는 사회에서는 은연중 국가를 이슬람보다 우선시하거나, 자신들의 이슬람 이해가 쿠란의 가르침에 가장 적합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터키는 이런 국가주의 이슬람 이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국가들 중의 하나이다. 국가가 이슬람의 원리나 세속주의 정치원리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종교부' (Diyanet İşleri Başkanhğı)를 기관으로 두고 합법적으로 종교에 관여하며 통제할 수 있고, 80 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이 자신들의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내세운 '터키-이슬람 종합'이라는 이념이 통할 수 있었던 것도 국가주의 이슬람이 터키인들의 정치문화와 종교문화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국가주의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터키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롭게 독립한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국가들이 취하는 종교정책을 보면 터키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터키나 중앙아시아에서 나타나는 국가주의 이슬람은 투르크인들의 이슬람 수용과정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터키 국가주의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이슬람 이해가 터키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된 역사적인 과정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후에 우리는 터키 국가 이슬람의 모습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종교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국가주의 이슬람 형성의 역사적 배경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이 이슬람 수용과정에 있어서 수피즘과 전통적 토착신앙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순니 이슬람이 지니고 있던 신학적, 법적 체계와 질서 때문에 투르크계 국가들은 순니 이슬람을 국가의 공식적인 종교로 받아들였다. 국가를 통치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통치에 필수적인 제도화된 법과 질서를 가지고 있는 순니 이슬람을 공식 적인 종교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 대부분이 비순니적인 이슬람을 따르는 상태에서 국가가 순니 이슬람을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했다는 것은 국가가 순니 이슬람을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슬람의 기능과 역할이 국가에 의해 조정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투르크 역사에서 국가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슬람 해석과 실천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투르크인들이 건국한 최초의 이슬람 국가인 카라한 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지만, 순니 이슬람을 공식적인 종교로 삼고 본격적으로 종교의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대 셀축제국 시대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대 셀축제국의 순니 이슬람 정책은 이후 오스만 제국과 현대의 터키의 국가주의 이슬람 해석의 토대가 되었으므로 이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투르크인들의 이슬람 수용과정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 셀축제국(1040-1157)은 11 세기 초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거주하던 오우즈족이 이슬람을 수용하고 호라산 지역으로 이동하여 세운 투르크 국가이다. 대 셀축제국은 중앙아시아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라비아 반도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압바스의 보호자로 자처하였다. 투르크인들이 세운 대 셀축제국은 정치, 문화 그리고 사회적 관점에서 이슬람 세계에 하나의 중요한 변환점을 가져왔다. 그것은 대 셀축제국에 의해서 11 세기 중반까지 중동 이슬람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치적 요소인 "터키 요소"가 이슬람 세계에 자리 잡게 된 것과, 945 년 이래 이란계 시아파의 영향 아래에 있던 압바스 왕가의 칼리프를 구해 내어 자신의 보호아래 두게 된 것이다. 이 두 사건은 이후 터키계 국가들이 중동에서 순니 이슬람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투르크 역사와 투르크인들의 이슬람 해석에 중요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후 터키 역사에 가끔씩 등장하여 사회와 종교의 분열을 야기시켰던 비정통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력을 사전에 막아 내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 셀축왕조를 거쳐 오스만 제국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투르크인들이 세운 나라들이 순니 이슬람을 공식적인 종교로 수용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투르크인들이 건국한 대 셀축제국이 시아파와 비정통 이슬람에 대항하여 순니 이슬람에 제공한 정치적 지지와 보호는 이후 발흥한 오스만 제국의 기본적인 정치이념이 되었고 그 결과 이슬람 세계에서 순니 이슬람이 주류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 셀축제국이 오늘날 터키인들의 국가주의 이슬람 해석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토대를 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터키인들의 사고에 이러한 이슬람 이해가 실제적으로 뿌리내리게 된 것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터키에서 국가주의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스만 제국에서 국가의 종교정책과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오스만 제국의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는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실질적인 제국을 건설한 술탄 메흐맷에 의해서 확립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부족 국가시절부터 이슬람을 정치와 종교적 이념으로 삼고 이슬람 전파를 정복의 합법적인 이유로 내세웠지만 1453 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비잔틴이 멸망하기 이전까지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453 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한 정복자 술탄 메흐맷(Fatih Sultan Mehmet: 1432-1481)은 이슬람을 국가와 동일시하면서도 자신을 동로마의 후계자이며 동시에 동방교회의 새로운 보호자로 자청하였다. 오스만 황제의 이러한 행보는 국가를 이슬람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의미했다. 정복자 술탄 메흐맷 치세 동안 관습법이 샤리아 법과 거의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여러 분야에서 폭넓게 적용되었다는 것은 국가가 이슬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시라고 할 수 있다. 관습법이 샤리아 법과 함께 적용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당시 황실사가였던 툴순 베이 (Tursun Bey)의 Tarih-i Ebu'l Feth(위대한 정복자의 역사)이라는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작품에 의하면 오스만 황제는 이제 'Zıllullah fil-Arz'(지상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이며 하늘로부터 지상에 내려온 위대한 신의 거룩한 대리자로 묘사된다.


정복자 술탄 메흐맷은 개인적인 정체성이나 생활의 방식에 있어서 전형적인 무슬림이었지만 제국의 통치자로서 이슬람과 그와 관련된 기관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정교본부를 통치자의 관할에 두었던 비잔틴의 경우처럼 제국 내에 이슬람 최고 기관인 종교부 (Şeyhülislamlık)를 자신의 수하에 두고 최고 이슬람 지도자인 세이훌이슬람(Şeyhülislam)의 임명과 퇴임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상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로 군림하게 된 오스만 황제들은 국가의 정치적 수반일 뿐만 아니라 종교의 수반으로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에서 이슬람은 국가의 권력과 통제 아래 귀속되고 독자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오스만 황제들의 종교정책과 함께 국가 이슬람을 강화시킨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제국과 경쟁관계에 있던 이란에 사파비드(Safevi) 왕조의 수립이었다. 1502 년 샤 이스마일의 통치하에 건국된 사파비드 왕조는 시아 12 이맘파를 국가의 공식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샤 이스마엘이 주도하는 사파비드 제국은 자신의 경쟁자였던 오스만 제국을 향하여 정치적 공세뿐만 아니라 시아파 이슬람을 아나톨리아에 확산시키기 위한 종교적 공세도 펼쳤다. 터키 역사에서 '사파비 프로파간다' (Safevi propagandası)로 알려진 이러한 종교적인 공세는 알레비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종교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터키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오스만 통치자는 시아파 사파비드의 이러한 공세에 맞서 정치적, 신학적으로 순니 이슬람을 수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왜냐하면 순니 이슬람은 오스만 제국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보장하는 근거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아파는 자신과 백성의 대부분이 신봉하는 순니 이슬람이 무신론자(Rafız)로 규정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은 시아파 사파비드에 맞서 찰드란(Çaldıran: 1514 년) 전투를 비롯하여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특별히 술탄 야부즈 셀림(Yavuz Selim: 1470-1520)의 치하에서 샤 이스마엘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아나톨리아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이란 사파비드에 맞서 벌인 전쟁은 오스만 제국이 무신론자(Ehli Rafza)들로부터 순니 이슬람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국가가 종교를 관할하도록 만든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1517 년 야부즈 술탄 셀림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난 후 칼리프의 직위가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넘어온 것이다. 이 사건은 야부즈 술탄 셀림과 그의 후계자들에게 순니 이슬람의 수호자로서의 역할과 함께 모든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이며 통치자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부여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는 칼리프직에 따라 유럽의 기독교에 대항하여 이슬람을 대표할 뿐 아니라 이슬람을 수호하는 임무도 부여받게 되었다. 현재 터키에서 국가주의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종교의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관리자가 된 오스만 제국이 실질적으로 이슬람에 어떠한 영향을 행사 하였는지를 살펴보아야한다. 왜냐하면 현대 터키를 건국한 집단과 국민들의 국가와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토대에는 오스만 제국의 종교에 대한 태도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에서 국가와 종교와의 관계


오스만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1299-1918) 종교는 국가와 사회를 연결하는 정치적, 문화적 교량의 역할을 수행했다. 제국의 통치자와 대다수의 주민들은 순니 이슬람을 하나의 공동적 가치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제국의 정치체제는 이슬람의 범위를 넘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오스만 황제들은 자신의 통치권을 귀족들과 같은 조직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습적 관료를 통해 행사 하려고 했다. 오스만 제국에는 자신의 영토를 소유한 귀족과 같은 계층이나 지방 제후와 같은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는 제국에 속한 모든 영토의 소유자였고, 국가는 지방과 종교 그리고 인종을 넘어선 위치에 있었다. 나라를 통치하는 관료들은 오직 오스만 술탄 한 사람에게만 충성하여야만 했다. 국가는 개인이나 그룹의 이익을 초월해 최대한 독자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국가는 '통치의 지혜'(hikmet-hükümet) 라는 개념으로 불리는 자신만의 논리에 따라 행동했다. 이러한 논리는 앞에서 정복자 술탄 메호맷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가의 필요가 이슬람의 필요보다 우위를 점하는 것을 의미했다.


오스만 제국에서 국가와 종교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의 관계를 규정하던 밀레트(Millet)라는 제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제도는 오스만 제국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종교적 신앙에 따라 구분하고 조직한 것이었다. 밀레트 제도는 이전부터 무슬림들이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 제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것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들이었다. 오스만 통치자들은 각 밀레트에 속해 있는 그룹들의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각 밀레트는 자신들의 종교적 수장의 지도에 따라 공동체의 질서의 유지하고 교리적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는 법적인 자치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이슬람 이외의 종교적 그룹들이 자체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법적, 제 도적 지위를 확보해 주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이 제도를 수용한 것은 제국 내의 다양한 종교적 그룹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제국은 각 밀레트와 엄격한 법적인 관계를 맺음으로 통치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고 동시에 이단들과의 싸움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밀레트 제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수직적으로만 가능하도록 했지만 제국 내의 서로 다른 종교 공동체들이 분리되어 살면서 공존할 수 있는 기능을 했다. 오스만 제국내의 각 종교 공동체들은 같은 제국 내에서 한 통치자의 지배를 받고 살았지만 상호 수평적인 관계가 거의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찰이나 충돌없이 공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도 안에서 이슬람은 수평적으로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로 구성된 무슬림 공동체들을 통합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해주는 규범적 역할을 하면서, 수직적으로는 통치자와 백성의 관계를 규정하는 준거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계층에 있었던 울레마들은 자신들의 공식적인 임무는 아니었지만 국가와 무슬림 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정통 순니 이슬람의 수호자로서 한편으로는 황제와 국가의 지위를 정당화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슬림 백성들에게 이슬람의 가르침과 원리에 순종하도록 하면서 술탄의 권력이 지나치게 절대화하지 않도록 조절하였다. 그러나 울레마 집단이 자율적으로 그러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종교적 기관이긴 했지만 울레마들도 군사나 행정 그리고 재정을 담당하는 다른 기구들처럼 국가의 체제에 통합되어있었다. 한 국가의 기관으로서 그들의 임무는 술탄의 통치를 보좌하고 이슬람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원리적으로는 제국과 술탄의 정통성과 권위가 이슬람에서 나옴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국가가 종교적 기관을 관장하고 울레마들을 강하게 통제하였다. 일반 무슬림들이 가지고 있던 국가와 종교와의 관계도 그와 같았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에서는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존재했던 국가와 교회 사이의 긴장과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은 이슬람 샤리아법과는 별도로 제정된 황제의 관습법(örf-isultaniye)이라고 불리던 법에 따라 통치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오스만 제국의 역사가들 가운데는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의 원리에 따라 통치되던 이슬람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황제의 법이 샤리아에 위배되는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한 법이 재정될 때에는 그것이 이슬람의 원리에 위배되지 않아야하고 샤리아에서 규정하지 않는 주제이어야 했다. 따라서 그 법들은 주로 국가의 행정적인 일과 공적인 영 역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들 법 가운데는 이슬람과 관련된 내용도 있었다. 이 종교법들은 제국 내의 무슬림 공동체들을 동일한 신학과 신앙으로 통합하고 변방에 있는 분리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이단적인 분파들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재정된 것이었다. 오스만 정부는 이러한 법을 사용하여 변방에 있는 비정통적인 이슬람 요소들과 싸우면서 그 지역에 정통 이슬람을 강화하기 위해 모스크를 세우는 작업들을 계속하였다.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비정통 무슬림들의 순니화 작업은 그들 가운데 정통 이슬람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할 뿐 아니라 순니 이슬람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황제에게 충성심을 불러 낼 수 있는 것이었다. 제국의 영토가 확장되고 제국의 통합에 잠재적인 위협 요소로 인식되던 문화의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이슬람은 국가의 통합을 유지시키기 위한 하나의 접착제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고, 국가 또한 그러한 목적을 위해 이슬람을 활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국가의 이슬람 정책은 오스만 제국의 말기에 갈 수록 더욱 강화되었다.


18 세기 중반부터 유럽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며 계속적으로 영토를 상실해 가던 오스만 제국은 1839 년 탄지마트(Tanzimat) 개혁을 단행하며 서구식 근대화 작업에 돌입하였다. 서구적인 시민의식이나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된 근대화 작업은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목적 또한 군사적, 기술적인 혁신을 이루어 서구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개혁을 주도하던 세력은 서구의 영향을 받은 실증주의자들이었다. 이들 개혁세력은 군사력을 증강하고 현대적인 기술을 도입하여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려고 시도하였지만 기득권을 쥐고 있는 울레마들의 강한 반발에 직면하였다. 개혁주의자들은 국가가 서구에 대항할 힘을 갖추기 위해서는 울레마들의 전통적 이슬람 교육을 탈피해야하고 국가가 이슬람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의 노력은 서구의 일방적인 공세 앞에 아무런 효과도 거둘 수 없었다. 그러자 울레마들은 오스만 제국이 부활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제도나 이념이 아니라 기술만 받아들이면서 제국의 백성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역할을 하는 이슬람은 더욱 강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새로 권자에 오른 압둘하미드 2 세(II. Abdülhamid: 1876-1908)는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새 술탄은 서구의 민족주의 영향으로 분열의 일로에 있던 제국을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이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30 년 이상 동안 지속된 긴 통치기간 동안 그는 이슬람을 내치와 외정의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슬람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한 그의 정책은 이후 터키의 건국과정과 정치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압둘하미드 2 세가 이슬람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기 위해 활용한 대표적인 방법은 칼리프제도의 부활과 제국 내 비무슬림들에게 적용하던 밀레트 제도를 무슬림들에게 적용한 것이었다. 1878 년 러시아와의 전쟁 이후 제국이 해체될 위기에 직면한 압둘하미드 2 세는 제국 내에 존재하던 여러 무슬림 민족을 하나의 밀레트로 결집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한 시도는 제국의 기반을 더 이상 오스만 왕가가 아니라 칼리프제도와 무슬림 공동체로 이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오스만 제국에 있어서는 하나의 혁명적인 변화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는 오스만 제국이 더 이상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배경으로 하는 밀레트들로 이루어진 국가가 아니라 무슬림들로만 이루어진 이슬람 국가를 지향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을 수단으로 무슬림들을 하나의 결집하여 제국을 구하려는 술탄의 시도는 별다른 장애 없이 진행되었다. 특별히 베를린 협정으로 기독교인들의 통치하에 들어간 발칸반도와 카프카시아 지역에서 아나톨리아로 유입된 사백만 이상의 무슬림들이 술탄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 구실을 하였다. 이들은 알바니아, 보스니아, 불가리아, 체젠 등과 같이 다양한 인종적, 언어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슬림이라는 공통적 이유로 오스만제국에서 분리 독립한 기독교계 국가들과 러시아의 통치 아래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슬람적인 민족 정체성과 정치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이슬람을 공통적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제국을 재건하려는 술탄의 시도는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압둘하미드 2 세가 오스만 황제에게 주어졌지만 이전의 황제들이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칼리프직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은 유럽의 열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비록 실효성은 없었지만 형식적으로 오스만 황제는 세계의 모든 이슬람권을 대표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압둘하미드 2 세가 유럽의 협상 테이블에 않았을 때 기울어가는 제국의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는 것 보다는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의 모든 무슬림들을 대표하는 칼리프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훨씬 유리한 것 이었다. 칼리프직은 모든 무슬림들을 오스만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두지 않고도 유럽 열강에 의식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카드처럼 여겨졌다. 당시 서구에 의해서 범이슬람주의(panislamism)로 불린 압둘하미드 2 세의 이런 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압둘하미드 2 세는 자신의 칼리프 직위를 그 동안 정치적, 종교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아랍권과 수피 타리카트들을 끌어들이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우선 아랍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메카와 메디나의 재건과 보호를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하면서 모든 무슬림들에게 성지 순례를 적극 권장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아랍 무슬림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성지 순례를 통해 무슬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다양한 순니 수피 타리카트들과 교류하면서 타리카트 지도자들을 이스탄불로 초청하여 자신의 자문으로 임명하였다. 오스만제국 말기의 이러한 이슬람 정책은 이후 무스타파 케말파샤에 의해 주도된 독립전쟁뿐만 아니라 현대 터키에 있어서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와 국가 이슬람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스만 말기 무슬림 지도자들이 압둘하미드 2 세의 이러한 정책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다. 무슬림 지식인들은 이슬람이 오스만 제국의 몰락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던 실증주의자들에 대응하는 그 이상으로 이슬람이 술탄에 의해서 정치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서 저항했다. 무슬림 지도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몰락의 책임이 이슬람이 아니라 황제의 절대 권력에 있으며, 이슬람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어떠한 통치형태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 책에서 국가 이슬람이라고 부르는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에 불만을 가지고 술탄의 권력에서 이슬람을 구하고자했다. 이들이 주장하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오스만 제국의 절대왕정에 반대하고 쿠란 42 장 38 절의 "서로 의논하여 결정하라"는 원리에 따라 협의기구에 기초하는 정치체제를 세워야한다. 둘째, 전통적인 이슬람 기관들은 국가 통치의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하고 이슬람 초기의 원래 상태로 되돌아 가야한다. 셋째,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반복적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데서 탈피하여 이슬람을 생동감 있고 창의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10 세기 이후 금지된 '종교적 해석'(içtihad)이 개방되어야 한다. 이런 내용들은 이후 근본주의 이슬람이 주장하는 과거로의 회귀나 샤리아로의 복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들의 주장은 오스만의 통제아래 있던 이슬람을 권력에서 독립시켜 당시의 상황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이슬람 개혁주의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이슬람의 수용과정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터키인들의 국가 이슬람 이해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들과는 달리, 세속주의자들은 이슬람의 반대편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주의적 이슬람을 거부하는 대신 그것을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1881-1938)과 그의 동료들이 터키 독립전쟁과 건국을 성공적으로 이끈 요인 가운데 하나는 외세에 대항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데 이슬람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터키 독립전쟁과 건국과정에 있어서 국가와 종교의 관계


터키 독립전쟁과 건국을 주도한 무스타파 케말파사와 그의 동료들이 가지고 있던 이념은 서구의 실증주의와 세속주의 공화정에 기초한 민족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들 건국세력이 실증주의와 세속주의를 이념적 기반으로 삼은 것은 오스만제국의 멸망과 무슬림 사회의 저개발과 무능함이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비합리적이고 보수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케말리즘(Kemalism)으로 알려진 이러한 이념에 의하면 이슬람은 정치, 법, 교육, 경제와 같은 사회의 공적인 분야에서 완전히 제외되어야 했다. 케말리즘은 이슬람의 역할을 사회적 윤리나 개인적 신앙의 세계에 국한시키는 한편 이슬람이 개인의 영역에서 벗어나 공공의 영역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국가의 엄격한 통제아래 두었다. 그렇다고 해서 케말주의자들이 이슬람을 완전히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묶어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가치를 중분히 인식하고 있 었고 독립전쟁과 터키건국 과정에서 그러한 점을 충분히 활용했다.


케말주의자들은 1919 년 독립전쟁을 시작하면서 그것이 무슬림들을 결집하여 오스만 제국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 선포하였다. 그리고 1920 년 오스만 제국이 1 차 대전에 폐하고 세브레스 협정(Sevres Antlaşması)이 체결되자 독립전쟁은 기독교 점령 세력에 맞서 이슬람을 구해내기 위한 전쟁으로 승화되었다. 세브레스 협정은 오늘 날 터키 영토의 대부분을 서구 열강이 분할 통치하고 아나톨리아의 동쪽 지역은 아르메니아와 쿠르드족이 분할해서 독립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패전국으로서 오스만 제국이 수용한 이러한 내용은 국민들의 명예에 큰 손상을 입혔고 종교적으로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슬림들의 이슬람 정치의식이 크게 고양되었고 케말주의자들은 그러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케말주의자들은 국민을 이슬람의 깃발아래 결집 시키는데 울레마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독립전쟁 중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1920 년 4 월 23 일 앙카라(Ankara)에 소집되었던 제 1 차 의회에서 의석의 20%가 울레마에게 배분되었다. 독립전쟁과 새로운 국가의 건국 작업이 터키인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이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강조는 터키 건국과정에 작성된 문서들과 엘주름(Erzurum), 시바스(Sivas)에서 모였던 대표회의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었다. 이 문서들에서는 "터키 민족"이라는 표현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한 민족을 구성하는 무슬림들" 또는 "모든 무슬림 주민들" 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터키 해방전쟁에 참여한 무슬림들은 터키인을 위한, 또는 터키 건국을 위한 해방 전쟁이 아니라 유럽 기독교 국가의 압제로부터 칼리프직을 구해내기 위한 무슬림 해방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전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자 케말주의자들은 이슬람을 자신들의 이념에 가장 큰 적대세력으로 규정하고 이슬람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현대 터키를 건국한 케말주의자들이 내세운 새로운 국가의 이념은 해방전쟁에서 내세운 이슬람이 아니라 실증주의에 기초한 세속주의였다. 이들은 이슬람을 근대화와 진보에 장애가 되는 수구적이고 전근대적인 요소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이슬람을 통제하였다. 그렇다고 케말주의자들이 국민의 절대다수가 신봉하는 이슬람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효용성과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슬람의 위험성을 견제하면서 국가 발전과 통치를 위해 필요한 효용성을 극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국가와 정치의 이슬람에 대한 통제도 이러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국가의 정책에 순응적이고 친화적인 소위 '현대 이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케말주의 지배자들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1923 년 건국 후 다음과 같은 일련의 연속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칼리프직 폐지와 종교부를 설치(1924); 통합 교육의 명목 아래 종교지도자들의 양성기관이던 율법학교(medrese) 폐교(1924); 타리카트들의 활동 금지(1925); 두건과 베일과 같은 전통적인 이슬람 복장 착용 금지 (1925); 샤리아 대신 유럽식 형법과 상법의 도입(1926); 아랍 알파벳 대신 라틴 알파벳 도입(1928); 이슬람을 국가 공식종교로 인정하는 것을 폐지(1928); 여성들에게 참정권부여(1934); 세속주의를 헌법의 기본원리로 제정(1937); 종교나 종교적 분파에 기초한 정당설립 금지(1938).


터키 건국세력이 이슬람을 정권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일련의 통제정책을 취하면서도 이슬람을 결코 배제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목표로 하던 새로운 민족국가를 세우는데 있어 이슬람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터키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폐허 위에 다양한 인종적 언어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구성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민족적 언어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터키인'라는 동일한 민족의식을 가진 하나의 민족국가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문화적 통일이 필요했다. 건국 당시 아직 터키어가 공식적인 언어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터키인' 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무슬림이 되는 것이었다. 유럽이나 발칸지역에서 무슬림과 터키인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아나톨리아로 이주한 사람들은 비록 터키어로 말할 수 없었지만 터키인으로 불리는 것을 당연시했다. 따라서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 민족국가로 만들어 가는데 이슬람은 가장 자연스러운 토대였고, 그것을 대신할 만한 다른 어떤 대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혈통적으로 터키인이고 터키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하더라도 무슬림이 아니면 터키인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케말주의자들이 이슬람을 자신의 가장 큰 위협으로 경계하면서도 이슬람을 체계에 순응적인 형태로 변화시켜 이용하고자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무슬림들에도 불구하고 군부를 중심으로 한 케말주의자들이 이슬람을 터키화시키는 과정이 비교적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은 전통적으로 국민들이 가지고 있던 국가주의 이슬람의 역할과 군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만일 이러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이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전쟁에 참여한 무슬림들이 세속주의를 지향하는 케말주의자들의 공세를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터키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국가에 의해서 보호받기 때문에 이슬람을 수호해주는 국가 없이는 이슬람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국가 내에서도 특별히 군대는 신성한 기관으로 인식 된다. 군대가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 국가와 종교를 지켜주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개 군인들은 '무함마드의 군인'이라는 의미인 메흐메트칙(mehmetçik) 이라고 불리며 군대는 '선지자의 식솔’(Peygamber Ocağı)로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은 순교자(şehit)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터키 국민의 대부분은 군에 애정을 가지고 신뢰하는 경향을 보인다. 터키인들의 국가와 군대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슬람을 터키화 하는 작업은 1928 년 모스크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에잔(ezan)을 터키어로 낭송하도록 하는데 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조치에 대한 반발로 인해 1930 년 메네멘(Menemen) 사건이 발생하자 케말주의자들은 이슬람을 터키화하는 작업을 수정하게 되었다. 터키를 건국한 케말주의자들의 영향력이 다소 감소되고 친 이슬람적인 성향을 지닌 민주당(Demokrat Partisi)이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집권한 1950 년대 이 후에도 국가의 이슬람 정책에는 변화가 없었다. 현대 터키에서 국가주의 이슬람이 어떤 형태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부의 역할과 기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부의 역할과 기능


정부 산하의 기관으로서 종교부의 임무와 역할은 1965 년 통과된 633 조 "종교부의 설립과 임무에 대한 법률"(Diyanet İşleri Başkanlığı Kuruluş ve Gürevleri Hakkında Kanun) 제 1 항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있다:
"이슬람 종교의 신앙, 예배, 윤리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고, 종교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국민을 계몽하고, 예배장소들을 관장하기 위해 설립된 종교부를 정부의 산하에 둔다. "


이 법은 종교부에 이슬람교 신앙, 예배, 도덕과 관련된 업무와, 종교문제에 대한 국민 계몽 업무 그리고 모스크나 기도소와 같은 이슬람 사원을 관장하는 업무 등 3 가지 역할 또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 조항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부가 종교문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법의 다음 조항들에서 종교와 관련된 법의 제정과 집행의 권한은 국회와 정부에게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슬람은 그 특성상 신앙과 예배 와 윤리의 영역을 법의 영역과 나눌 수 없다. 이슬람의 원리에서 볼 때 이러한 분리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으로 이러한 분리를 해 놓은 것은 정치적 권력이 사상적인 면이나 실제적인 면에서 신앙과 예배 그리고 윤리의 영역을 종교부의 관할 아래 두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조금의 타협도 없이 그러한 법적 조항을 그대로 실행해오고 있다.


종교부에 주어진 역할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두 번째 조항은 "윤리와 관련된 업무"이다. 종교부에 윤리적인 역할이 부여된 것은 법률이 제정되던 당시 터키의 사회적 혼란을 이슬람 윤리를 내세워 진정시켜보고자 하는 정치권력의 이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종교부가 사회적 윤리를 고양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종교부가 이슬람을 통해 사회적 윤리의식을 고양시키거나 주도할 수 있는 그 어떤 법적, 실제적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슬람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윤리를 보존하고 고양시키는 업무는 대부분 교육부가 담당하고 있다. 교육부는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종교와 윤리"를 필수과목으로 규정하고 대학에서 이슬람 신학을 전공한 종교선생들이 그 과목을 가르치도록 하고 있다. 이슬람 신학대학 역시 교육부의 관할에 놓여 있으므로 종교선생은 양성과정에서부터 임용 그리고 가르치는 교과의 내용까지 모두 교육부의 관리를 받고 있다. 따라서 종교부가 이슬람을 통해 사회적 윤리를 유지하고 고양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교육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볼 때 법에서 규정된 내용가운데 종교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예배장소인 모스크(cami)와 기도소(mescit) 를 관리하고 이슬람에 대해 국민을 계몽하는 것이다. 현재 종교부는 예배장소의 건축 허가, 관리, 이맘의 임명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권한도 1997 년 2 월 28 일 군부의 정권개입 이후에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현재도 종교부가 예배장소를 허락하고 보수하는 것을 허락하는 권한만 가지고 있지 이러한 일을 직접 집행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은 전혀 없다. 군부가 1997 년 2 월 28 일 정권에 개입하여 정부를 해산 시키고 종교부에 예배장소의 관리 감독에 대한 권한을 강화시킨 사건은 국가의 정치권력이 이슬람을 통제하기 위해서 종교부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터키 현대사에서 ‘현대판 군사 쿠데타' 혹은 '포스트 모던 군사 쿠데타'로 알려진 1997 년 2 월 28 일 사건 (28 Şubat)으로 정권을 잡은 자들이 왜 종교부를 이용 했는지를 이해하려면 간략하게라도 2 월 28 일 군부개입의 과정을 살펴보아야한다. 사건은 당시 이슬람 정권 수립을 목표로 결성된 복지당(RP)이 1996 년 7 월 총선에서 승리하고 정도당(DYP)과 연정을 구성하여 집권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복지당과 정도당이 연정을 구성함으로서 수상이 된 복지당 당수 네즈메틴 엘바칸 (Necmettin Erbakan)은 주요 이슬람 국가들의 대통령들과 회동을 가지면서 터키가 가야 할 방향이 유럽연합이 아니라 이슬람연합이라고 주장하였다. 수상의 그러한 행보는 세속주의 건국이념에 위배된다고 본 야당과 언론 그리고 지식인들의 강한 불만을 유발시켰다. 이어서 복지당의 주요 인사들이 터키의 세속주의와 민주정치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나섰고, 심지어 이슬람의 원리에 기초한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지하드도 불사해야한다는 발언까지 나왔다. 사법부는 그러한 발언이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세속주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판결하고 발언한 사람들에게 벌금형을 부과하며 저지에 나섰다. 하지만 엘바칸은 사법부의 그러한 행동을 항의하듯이 터키 건국이후 처음으로 법적으로 금지 상태에 있던 타리카트의 지도자들을 라마단 금식기간 동안 수상관저로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다. 수상의 이러한 행동은 세속 주의자들과 군부에게는 엄청난 충격적이었다. 무스타파 케말의 후예임을 자청하는 군부는 정치권력의 최상층부에서 진행되는 일련의 사태들과 세속주의의 상징인 수상관저에서 벌어진 그러한 모임을 간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상황가운데 군최고 지휘관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위협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긴급회동을 가졌고, 근본주의 무슬림들의 요새로 알려진 수도 앙카라 근교 신잔(Sincan) 시에서 군인들이 탱크를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벌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어서 전국에서 모인 여성 시민단체들이 앙카라에 모여 근본주의 이슬람과 정부를 항의하는 대형 집회를 열었다.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대통령이 수상에게 경고 편지를 보냈지만 사태는 진정되지 못하였다. 결국 1997 년 2 월 28 일 국가안보위원회(Milli Güvenlik Kurulu)는 모임을 가지고 이슬람 근본주의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최우선적인 요소로 규정하고 세속주의와 민주주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련의 결정을 하였다. 국가안보위원회가 결정한 내용의 핵심은 근본주의 이슬람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타리카트들이 운영하는 학교를 폐지하거나 문교부로 운영권을 이전할 것, 5 년의 의무교육기간을 8 년으로 늘려 이슬람 중고등학교의 중등 과정을 폐지할 것, 쿠란 교습소를 정부의 통제아래 둘 것,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이 이슬람식 복장을 하는 것을 금지할 것, 그리고 예배장소를 통제해 이슬람 근본주의가 확산되지 않도록 할 것 등이었다.


국가안보위원회의 결정으로 1998 년 제정된 '이슬람 근본주의 방지법’(터키어로 "irtica yasaları"로 알려져 있다)은 종교부에 모스크와 기도소에 대한 관리권과 통제권을 확대시켰다. 당시 정부가 제정한 이슬람 근본주의 방지법에 의하면 "모스크와 기도소의 건축과 운영은 종교부 권한"에 두었으며, 한 분파가 모스크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소원을 재기하자 대법원은 이 법을 근거로 "모스크는 국가의 재산이다"는 판결을 내렸다. 현재 터키의 모든 모스크는 법적으로 국가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이맘이나 설교자들도 종교부에 의해 임용되고 발령받은 공무원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종교부의 권한을 확대한 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치권력이 종교의 영역인 모스크와 기도소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종교부의 두번째 역할인 "종교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국민을 계몽''하는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종교부 임무규정 제 6 항에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종교적인 문제를 연구, 조사하거나 위탁하는 것, 둘째, 종교적인 질문에 답변하거나 교육하는 것, 셋째, 종교적인 주제들에 관해 출판하고,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공영방송과 협력하여 방송하는 것. 이 규정에 의하면 종교부가 국민들을 계몽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영역은 일반적으로 모스크에서 행해지는 설교와 종교와 관련된 이견이 있는 문제들에 대한 결정 (fetva) 그리고 종교서적을 출판하고 종교방송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규정에는 종교부가 학생들의 종교교육이나 성직자들의 양성과정에 관여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맘들의 설교나 종교부의 이름으로 발행되는 서적이나 방 송의 내용도 국가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나 종교정책에 위배되지 않아야한다. 이것은 종교부의 계몽활동이 정치권력이 규정해 놓은 "미신적인 내용이 제외된 종교적 지식과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조화되는" 조건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종교부가 이슬람에 대해 국민을 계몽시킨다는 것은 종교부가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적합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이슬람에 대한 해석을 발전시키고, 그러한 해석에 따라 국민을 계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터키에서 종교부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터키에서 세속주의가 어떻게 정의되는 지를 살펴보아야한다. 터키에서 세속주의는 서구적인 관점에서 정치와 종교 혹은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세속주의는 터키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와 종교가 서로의 영역에 관여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세속주의는 서구적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터키 국가주의 이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터키의 세속주의를 서구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터키의 국가 이데올로기는 서구에서 통용되는 세속주의를 위험한 것으로 본다. 그것은 국가가 이슬람을 독립적으로 내버려두면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특성으로 인해 정치에 관여하게 되고 결국 국가를 이슬람화해서 세속주의도 무너져 내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가 종교를 통제하여 종교가 정치와 국가의 공공영역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터키에서의 세속주의가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세속주의 이해에 의하면 종교는 어떠한 형태로든 정치에 관여할 수 없지만 정치는 종교에 관여할 수 있고 종교적 해석의 문제까지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결국 터키에서 세속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정치가 종교를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속주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와 적용은 종교 지도자들과 학자 그리고 정치인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비판 되어왔지만 1923 년 건국부터 지금까지 국가는 이슬람을 항상 그러한 관점에서 보아왔고 무슬림들과의 관계도 그러한 토대위에서 발전시켜왔다. 종교부는 그러한 세속주의적 국가이념의 산물로 전통적으로 국가나 정치가 이슬람과 무슬림적인 요소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도구의 역할을 해왔다. 건국 이후부터 현재까지 종교부의 역할은 무슬림들을 위한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종교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국가의 강압에 의해 이슬람을 해석하고, 국민들의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바꾸는 것이었다. 종교부가 공공연하게 정치권력의 시녀노릇을 하는 것은 이 단체의 존재기반이 전적으로 정부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종교부의 장관과 관료들은 정부에 의해 임명되고 필요한 모든 자원 역시 정부로부터 공급을 받는다. 따라서 무슬림 대중들로부터의 나오는 존경이나 권위 같은 것은 없다. 단지 하나의 정치적인 기관으로 정치권력이 합법적으로 종교의 영역에 개입하여 종교를 통제하고, 세속주의 이념에 적합한 이슬람 해석을 제시하고, 정치권력을 정당화 시켜주는 기능을 해 온 것이다. 이스마일 카라는 이러한 관점에서 종교부가 "세속주의의 수호가 아니라 이슬람의 세속화”와 "이슬람을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기능을 지속적으로, 고집스럽게 수행해 왔다고 주장한다.


종교부의 기능이 이러한 것만으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법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지만 종교부는 공공연하게 이슬람을 획일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종교부는 오스만 제국의 전통을 따라 순니 하나피 종파의 이슬람 이해만을 공식적인 이슬람으로 인정하고 터키를 순니 하나피화하는 작업을 한다. 따라서 종교부의 활동과 지원에 알레비파나 시아파 계열의 분파들, 타리카트 수피주의 종파들 그리고 소수이지만 아직도 터키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동방정교의 견해나 필요는 전혀 반영 되지 않는다. 명칭만 종교부이지 실제로 이슬람의 다른 분파들이나 다른 종교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앞 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터키 인구의 15% 이상을 차지하는 알레비파는 종교부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하나의 이슬람 분파로서 조차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예배장소를 건축할 수 없고, 전통적인 예배장소나 예배의식도 문화센터나 문화적인 활동으로 규정된다. 종교부는 국가의 이념에 따라 알레비 거주 지역에 순니 모스크를 세우고 이맘을 파송하여 그들을 순니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터키 이슬람 종합”이라는 국가이념도 결국 모든 터키인들을 순니 무슬림화해서 국가의 단결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다. 종교부가 국가의 공공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순니 하나피 이슬람만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많은 반발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종교부의 정책방향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국가가 이슬람을 국가와 정치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으로 보는 관점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다면 종교부의 변화도 없을 것이다. 터키가 지금과 같은 국가이념을 지속하고 국민의 절대 다수가 무슬림으로 이루어진 국가로 존속하는 동안에는 종교부가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형태를 통해 국가의 종교에 대한 간섭과 통제는 계속될 것이다.

 


나가는 글


터키를 포함한 투르크인들의 이슬람 이해는 아주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신앙세계를 들여다보면 정통 이슬람과 비정통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과 이슬람 무속신앙 등이 서로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세계가 나타난다. 그러한 이슬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표면으로 드러날 때 정통 순니 이슬람, 수피 이슬람, 민속 이슬람, 국가주의 이슬람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된다. 이처럼 서로 모순되고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슬람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이 어떻게 한 국가, 한 사회 내에서 조화와 공존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내용에 있어서나 외관에 있어서 서로 달라 보이는 이슬람에 대한 해석들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것이 투르크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이것들은 투르크인들이 이슬람을 수용하기 이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토양에서 발아하여 역사적 과정을 통해 자라난 것이다.


우리가 투르크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들을 살펴본 이유는 이러한 작업이 위구르에서 터키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투르크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부닥치는 장벽들을 이해하고 극복하여 좀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투르크 무슬림들 가운데 재생산이 가능한 교회를 세우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발제자가 발표한 내용은 터키의 상황에 기초한, 대략적인 스케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투르크 이슬람에 대한 더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나가고 투르크인들에게 복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김성운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 2015 실크로드 포럼(터어키), 주특강 발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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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이슬람 이해(1) "중앙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에게 현지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 김성운 교수, 본 글은 2015년 실크로드 포럼의 주특강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Photo: Some rights re...
    Date2015.08.03 CategorySilk Road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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